성공 만들기

제4회 토강 강좌별 정리글

강병현 2008. 8. 29. 15:10

 

제1강 (내가) 철학하는 법, 한 가지


1-1. '인문학이 빛을 발하지 못하는' 이 시대에 '인문학적 공동체'를 표방하면서 독자적인 발걸음을 이어가는 <장미와 주판>이, 이제 <장쏘공>이란 독립된 공간을 축으로 새로운 역사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장쏘공>의 탄생은 없는 듯 있어 온 '동무들의 연대의 힘'에 바탕하여 가능해진 하나의 '인문적 사건'이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장쏘공> 안팎에서 나누는 작은 손길과 발길 하나하나가 '동무'의 관계로 맺어지고, 나아가 '인문적 연대의 힘'이 되길 기원합니다. 


1-2. <내가 철학하는 법, 한 가지>란 주제로 열린 제1강은 수강하신 분들 각자의 면면을 소개하는 시간으로 시작하였습니다. 대학생에서 일반인까지 다양한 이력을 가진 분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철학 공부에 대한 관심과 열정들로 꽉찬 표정과 분위기였음을 전합니다.


1-3. 이어진 김영민 선생님의 강의는 일방적 강의가 아닌 대화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이야기에 응해서 말하겠습니다."라는 언명과 더불어, 각자 '철학하는 법'에 대한 주제발표에 응대하는 형식으로 강의가 진행되어 일방적 강의의 단조로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의에 인용되는 텍스트들은 철학 고전을 비롯하여 영화, 소설, 시, 그리고 구체적 삶의 이야기까지 등장하는 다채롭고 다각적인 구성으로 철학의 관념적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한 강의였습니다. 특히,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명제를 던짐으로써 그동안 생각에 '골몰'했던 저와 같은 수강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다음 제2강이 기대됩니다.


1-4. 각자의 주제 발표와 강의가 이어지면서 예정됐던 강의시간은 3시간(3~6시)을 훌쩍 넘겨 8시가 되어서야 종료하였습니다. 무려 5시간의 연속 강의임에도 수강자들이 끝까지 자리를 지킨 점은 강의의 밀도를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1-5. 이미 예정된 <저녁자율모임>에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강의의 긴장을 풀어내면서 맛있는 굴비와 함께 대화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인문학 공부가 '인간의 만남과 관계'에 방점을 둔다는 점에서 <강좌> 이후의 작은 모임도 '동무의 싹'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자리한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12명 참석)



제2강 <계몽의 천일야화>


1강에 대한 수강자들의 정리 및 감상을 듣는 시간으로 시작된 2강도 시종일관 진지한 대화적 긴장관계가 유지되었습니다만, 아직은 생산적 대화의 수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선생님은 ‘대화를 전제한 강의’를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수강자들의 적극적인 질문과 대화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강에 이어 2강에 대한 수강 내용과 소감을 먼저 정리하고, 수강자 명단을 올립니다.

참고로, 이 정리의 글은 다분히 주관적이란 점을 말씀드립니다. 따라서 전체 강의 내용을 정리한 것도 아니고, 강조점에 있어서도 개인적 해석의 차이를 전제로 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2-1. “인간은 ‘길 위의 존재’(weg-sein)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수많은 페르조나(persona)를 갖고 살지만,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내가 교사로 살지만, 교사이기만을 고집하고 싶지 않아 토요강좌와 같은 곳에 와있는 것처럼 인간은 ‘자기 한계’를 ‘조건화’시키는 과정, 즉 ‘메타화’(겹의 사고) 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돌아보며 새로운 존재를 꿈꾼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 대한 영구한 비판”(푸코)처럼 “계몽의 본질은 재계몽이다.”라는 명제에 이른다.

이러한 계몽은 본래 ‘서양적 사건’이고 개념이지만, 동양(조선)의 북학파의 사상에서도 계몽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담헌의 비판적 상대화라든가, 초정처럼 신분적 처지에서 오는 계몽의 효과, 계몽이 이성적 형식만이 아닌 ‘바람과 토양’, 그리고 여행(연행-박지원)과도 연결되는 지점들이 바로 존재의 지평을 열어 간다고 말씀하신다.


2-2. “인간은 ‘1’(무지)과 ‘2’(거짓)의 관계를 벗어나 ‘3’의 진실(삼각관계)을 대면하면서 타자의 지평을 열어갈 수 있다.” 많은 경우 우리는 1과 2 사이를 맴돈다. 그래서 어쩌다 만나는 3의 진실이 낯설다. 이제, ‘삼각관계’에 눈을 돌려보자! 


2-3. 인간을 ①믿기, ②생각하기, ③의심하기의 3단계로 역사화 시켜본다면, 근대의 ‘생각하기’에서 나와 현대에는 의심하면서 ‘밖으로 나가기’를 통하여 새로운 ‘사건’과 ‘타자’를 만나면서 ‘관계’를 꿈꾼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우리가 의심만 하게 된다면 온전한 삶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기서 ‘연대’의 필요성이 제기된다는 강조의 말씀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우리가 ‘동무의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인 점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2-4. “모든 실천은 관계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넘어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심리주의’에 포박되지 말고, 역사에의 관심은 물론 더 나아가 관계와 연대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는 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태도라고 역설하신다. ‘김용옥-김훈’씨를 사례로 개인주의, 자유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가운데, 잠시 논쟁적인 분위기와 함께 대중적인 현상이기도한 심리주의 문제가 부각되기도 하였다. 즉 우리가 ‘개인적 변명’에 귀를 기울이기(심리주의에 빠짐) 시작하면 이 세상에는 무엇이든 다 용서가 되고 이해가 되며, 나아가 옹호의 시선까지도 싹틀 수 있으며, 따라서 어떠한 ‘악’도 규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말씀으로 나는 해석한다. 인간의 존재가 관계에서 규정되고, 역사(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면, 이웃(사회)에 대한 적절한 배려 없이 개인의 이익이나 취향, 재주(능력), 의도만으로 세상을 인식하려는 개인주의, 자유주의는 분명 한계가 명백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특히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적인 존재들이 역사를 무시하는 발언은 심히 병적이고 우려스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좀더 나아가 살펴보자면, 공적인 약속의 체계나 신뢰의 문제는 저버리고, 사적인 유대나 사적인 접근으로 공적 질서나 문제를 풀어가려는 관행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적폐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각종 조직 사회, 특히 공적인 조직 내에서도 공공연하고 익숙한 풍경임에도, 이것을 경계하는 시선이나 적극적인 개선의 노력은 소수자들의 가녀린 몸짓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2-5. 체계내 존재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인정투쟁’의 문제이다. “애초에 누가 나를 인정했는가?” “근본적으로 자기를 인정한 대상이 누구인가?” “그 ‘인정의 부재’를 경험한 존재는 어떤 모습을 띠는가?” 쇼펜하우어의 사례나 정신분석학적 지식이 증명하는 것처럼 ‘인정투쟁’의 문제는 존재 및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심대하다. 그래서 헤겔도 “인류의 역사는 인정투쟁의 역사이다.”라고 외치고 있다. 교사인 내게도 교육의 문제가 상당부분 인정의 문제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는다. 그런데 인정의 주체가 인정의 문제에 무지하다는 (교육)현실이 다소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인간은 ‘체계의 바깥’에 관심 갖기도 한다. 바로 ‘동무’가 시선을 두는 곳도 ‘체계 밖’이다. 체계 내의 인정투쟁에서 벗어나 새로운 만남과 관계를 조형하고, ‘자기 성숙의 마지막 지점’들과 대면하면서, 때로는 체계와 창의적 불화를 감수하면서 ‘다른 삶의 양식’을 실천하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요체라는 것을 김영민 선생님은 여러 차례 역설하셨다.


2-6. 1강에 이어 2강도 계획된 시간을 넘어 9시에 종료되었다. 저녁시간(6-7시) 1시간을 사이에 두고, 5시간 연속된 강의에서 선생님의 열정 앞에 수강생들은 감탄과 긴장감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저녁시간에는 함께, 그리고 자유롭게 식사하면서 간단한 인사와 대화도 나누었다. 이제 만남이 편안해지는 지점을 지나고 있는 것 같다.



제3강 소크라테스의 <변명>


먼저 2강의 복습 과정에서 선생님이 강조하신 내용을 정리하고, 이어서 <소크라테스의 변명>에 대한 강의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3-1.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주지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하신다. “순수한 지식은 관념의 강박에 지나지 않으며, 과거의 앎이 숙지고 모른 체하는 가운데 생활양식을 통하여 내 몸에 올라와야 하는 것처럼, 지식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잉여가 필요하다. 이것은 비용의 문제이고, 주체의  재구성의 문제에서 핵심적 주제이다.”

나아가 “지식의 덕은 지식의 알갱이 밖에 존재한다. 즉 공간적 밖, 시간적 외부에 존재하며, 비용의 지불로 나타난다”고 말씀하신다.

그동안, 강의를 통하여 선생님은 ‘비용의 문제’를 반복해서 강조하신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공부 자체가 비용이란 점은 쉽게 인정하면서도 비용 지불에는 주저하고 인색해지는 것이 공부에 철저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음으로 남는다. 따라서 또다시 강조되어야 할 지점은, 지식과 관련하여 비용의 문제를 인식하고 깨닫는 것 자체가 아니라 각자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러한 비용을 어떻게 지불하는가의 문제이다. 즉 ‘비용의 인식(앎)’이 아니라 ‘비용의 실천’이 관건이고, 그것이 공부의 요체라 하겠다.    


3-2. 동무란 간단히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나 일별한다면, “유토피아가 장소가 아니듯이, 동무도 장소가 아니라 관계이고, 교환의 방식, 소통의 방식이기에 (자본주의적)체계와의 창의적 불화 속에서 얹히고 섞이면서 새롭게 구성되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 어떤 폐쇄적 공간도 아니고 더구나 사람도 아니다.”

아직은 구체적 윤곽이 드러나지 않은 개념이라 오해의 소지가 많지만, 곧 출간될 ‘동무론’에 대한 신간을 접하고 나면 ‘동무 관계’의 조형이 더욱 실천적으로 다가올 것으로 기대된다.  


3-3. ‘인생의 쓴 맛’ 즉 상처의 문제와 관련하여,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이고 우연성이 개입되는 문제(재앙)를 제외한, 반복적이고 체계적인 문제로서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상처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타인의 아픔도 배워야 하듯이 인간의 상처에 대한 성찰 없이는 인간의 이해는 물론 관계의 진실에도 접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3-4. 선생님은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무능의 급진성’이란 고유의 인문학적 관점으로 독해하신다. 즉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능으로써 체계의 (사이비) 유능을 적발하고 폭로한다... 이것은 그의 변명과 죽음을 통하여 역설적으로 (체제)유능의 타락을 증명한 셈이다. 여기서 체계의 (사이비)유능 앞에 진정으로 유능한 존재가 기이한 무능을 보일 때 메시아적 기미를 살짝 드러낸다.”


3-5. “소크라테스의 삶의 일관성은 형식적 일관성과는 다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즉 진정한 일관성은 자기 일관성까지도 조롱할 수 있어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대상화하는 경지를 보이고 있다.”


3-6. “소크라테스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무화시키는 변증법적인 변론(명)을 전개하면서, 자기 말에 구속되지 않는 영혼(인물)임을 보여준다.”


3-7.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제의적 희생의 문제를 노정하는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위기 상황에서 체제는 희생양을 통하여 질서를 회복하려고 한다는 것이 지라르의 이론이다. 모든 시스템은 체계 유지를 위해 상징적 제의(행위)를 행한다(재현). 이것이 이데올로기 풍경이다. 일례로, 개인 관계에서 발생되는 상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사, 악수 등 용서를 위한 상징적 행위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 몸의 상처가 그러한 행위만으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처럼, 사회도 일종의 몸이기에 사회가 앓았던 상처는 결코 상징적 행위의 재현을 통하여도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따라서 용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요해서는 안된다.”

선생님의 글 “용서는 없다”를 읽으면 용서와 관련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들이 깊은 통찰로 다가온다.


3-8. 개인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명>의 독후감을 4가지로 정리한다.

1)전형적인 철학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념의 끈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잡아당긴다. 이것이야 말로 철학자로서 ‘진리에의 사랑’이 아닐까?

2)‘체계 밖’을 꿈꾸는 자의 영혼이 잘 나타나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가장 큰 선’으로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완전한 무’(깊은 잠)와 ‘여행의 길’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죽음의 희화이기도 하고, 세상의 조롱이기도 하다. 혹은 영혼의 자유를 보여준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체계적인 삶으로부터의 초월성을 드러내면서 ‘체계 밖’을 꿈꾸는 현자의 모습으로 읽힌다.

3)소크라테스를 심판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태도에 주목하는 것도 중요한 공부 요소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그의 변명이 결국 실패(혹은 성공)하였는데, 그것은 투표결과에서 나타난다. 1차 유죄 여부에서 280표(유죄)와 220표(무죄)이었으나, 2차 변명 이후에 실시한 2차 투표인 사형 여부에서 360표(찬성)와 140표(반대)으로 나타났다. 즉 1차 투표에서 무죄를 인정했던 시민들 중 80표가 소크라테스에게 돌연 사형의 표를 던졌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2차 변명을 듣고 흥분하였던 것인데, 이 사건을 희생양의 논리로 해석한다면, 일단 소크라테스가 ‘희생양’으로 규정되면서, 그 희생양 앞에서 시민들은 함께 돌을 던지는 것이 그들이 사는 길(질서)로 여긴 셈이다. 한편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살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소크라테스는 계속해서 신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인 인물임에도 ‘체계의 신’을 부정했다는 죄로 심판 받는다. 이것은 일종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제4강 <폭력의 기억>


먼저, 지난 시간의 내용을 복습하는 가운데 언급된 주요 논점을 정리하고, 이어서 <폭력의 기억>의 공부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4-1. “역사화와 자연화의 문제는 (인문학) 공부에 있어서, 중요하고 핵심적인 주제이다. 특히 역사화와 관련한 감성을 갖지 못하면 공부를 포기해야 한다.” 존재가 시간이듯, 인문학의 공부는 역사적 맥락을 타는 노릇일 수밖에 없으며, 역사적 맥락을 놓치는 공부는 도로일 뿐이다. 한편,‘진리와 주체의 문제'에서 '비용'이 중요한 논점임을 선생님은 다시 강조하신다. 즉 “주체는 자연의 과정이 아니고, 역사화된다. 그러므로 주체에는 배경, 이력, 과정, 맥락이 있으며, 일정한 비용의 결과로 주체가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진리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은 거울 같은 존재로, 진실(신)을 알려면 마음을 닦아야하고, 나만 깨끗하면 진리가 보인다.”고 하듯이, “나와 진상 사이에는 어떤 매개도 없다. 즉 역사화가 생략되었다. 흔히 고백도 탈역사화의 효과에 불과하다.”

결국, 주체는 “당대적 조건, 한계에 의해 형성된다.” 그래서 “현명한 싸움, 연대는 역사(기원)를 살펴야 한다.”


4-2.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전체성’이란 개념을 제시하였는데, 평소 에펠탑을 혐오했던 모파상이 결국 에펠탑 속으로 들어가야 했듯이, 우리가 숲(전체성)을 보려면 숲 밖으로 나가야 한다. 한편, 우리에겐 자본주의가 숲인데, 그 자본주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지경이다. 그래서 몇몇 나무(에고적 관심: 이익, 가족 등)만 보고 살아간다.”

우리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인문(학)적 관심을 갖고 공부하려면, “우리의 삶을 공동체로만 보지말고, 반복적인 체계(구조, 문화 등)로 봐야한다.” 그리고 "나와 사회 사이의 거리의 문제가 곧 역사화이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심리주의로부터 탈출하여 사회로 나가야 한다."


4-3. 새로운 삶의 전략이 필요한데, "그 한가지가 '-α' 전략이다. 이것은 ‘부재의 방식, 없애는 방식, 일종의 가로지르기 방식’이다." 이것은 체계의 명령에 충실히 복무하려는, 그래서 ‘체제의 유능’을 확보하려는 '+α' 전략과 길항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이다.

  "매체는 체계와 연동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이것에 따라 삶의 양식이 주어진다. 따라서 새로운 주체의 구성은 어떤 식의 매체나 관계, 그리고 소통방식의 재구성을 통하여 가능하다." 또한 "모든 시스템은 그것을 운영하기 위한 소통의 방식을 가지는데, 자본주의는 등가적이고, 즉시적인 교환방식을 통하여 성립된다. 따라서 이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비교환적 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도도하고 견고한 체계 속에서, 이러한 삶의 전략은 지난하고 가녀린 투쟁이면서 가히 혁명적인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는 싸움'이고, 연대가 절실해지는 것 아닐까?


4-4. <폭력의 기억>은 몸과 도덕의 문제를 주제화하고 있다. 즉 몸과 도덕은 길항 관계인 것이다. “니체의 도덕 개념처럼, 도덕은 '눈치를 보는 것'(매너, 조심, 절충하기 등)인데, 상처받은 몸은 눈치를 보지 않는다. 그리고 도덕은 몸을 죽이는 것이며, 몸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4-5. "기억은 관념이 아니라 물적 기호이다. 즉 상처, 흔적, 헌데 같은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앓는다.'(프로이트)"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6. “상처는 숨은 것, 나만의 것, 과거의 것, 몸의 것이므로 소통 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상처는 말이 아니고, 피이고 살이고 칼이다. 인식(생각)의 소통처럼 ‘알겠다!’ 가지고는 도무지 접근이 안되는 무엇이다.”


4-7. 선생님은 '생각'과 '상처'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 놓여 있음을 절감해야 한다고 하신다. “나는 생각 속에 있고, 너는 상처 속에 있으니, 상처(기억)를 앓는 자는 절대적 고독과 대면하게 된다.”


4-8. "폭력 속에 애착이 개입될 때, 피해자가 가해자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경우 제3자가 개입하여 폭력과 애착을 분리시켜주고, 상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 점에서 앨리스 밀러는 '전문가 증인'의 도움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치료에 실패하는 것은 '좋은' 제3자(안내자)를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4-9. "용서는 없다"란 글에서 선생님은 용서의 문제가 '관계'를 넘어 '체계' 속으로 이데올로기화되는 문제를 깊은 통찰로 보여준다. 선생님은 특히, '용서는 없다'란 제목으로부터 야기될 수 있는 오해, 즉 '용서하지 말라'는 도덕적 의미로의 해석을 경계하신다. 여기서는 '용서가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4-10. "세계를 3가지 범주로 분류하면, 1)실재적 세계, 2)상징적 세계, 3)상상적 세계(라캉 등)이다. 여기서 상처, 용서 등은 몸과 관련한 실재적 세계이고, 상처의 치유와 관련한 각종 상징 행위(악수, 기념탑 건립 등)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세계는 상징적 세계이며, 생각에 빠져 있는 자아 중심적 세계는 상상적 세계에 해당된다."

이 개념은 여러 학자들이 원용하고 있으며,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한 개념적 도구이다.


4-11. 상처의 문제에 대한 현명한 대응은, 회피이거나 분노의 직접적 폭발이 아니라 "상처의 자장이 내 삶의 양식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나의 분명한 스타일, 어휘, 전문성, 동무의 관계 등으로 조형된 삶의 양식에 충실할 때, 상처는 극복 가능해진다."

이처럼 상처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삶의 양식과 연동할 때, "구조적, 제도적으로 복수가 가능하다. 모든 것이 삶의 양식을 통하여 나오는 것인데, 그래서 삶의 양식을 바꾸면서 복수하는 것이 최선이 아닐까? 이 점에서 복수는 전혀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복수는 (인격)수양, 관념, 악수도 아니고 삶의 양식이어야 한다. 나의 관심의 초점은 바로 여기, 탈심리주의에 있다."


4-12. "<동문선>의 내용을 보자면, 정(情)을 3등급(상, 중, 하)으로 분류하여, 정이 없거나 무지한 경우(분노가 없는 경우)가 하급이고, 정에 매어 있는 인간 유형의 경우가 중급이며, 정을 잊어 먹은 경우로서 정을 깊이 알지만, 견고한 삶의 양식으로 일관하여 정을 '모른 체'하는 경우가 상급이다."

선생님의 중요한 (공부)화두인 '삶의 양식'과 관련하여 매우 유익한 시사점이 아닐 수 없다.


4-13. 강의가 끝나고, 대부분의 수강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님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이어 장쏘공에서 10시까지 예기치 않은 진지한 '종교적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제5강 <여자 정혜 / 아주 특별한 손님>


5-1. 우리가 실존적으로 대면하는 많은 문제는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풀리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즉 해결의 문제와 해소의 문제라 하겠는데, 해결의 문제는 '내가 없고, 문제만 남는' 경우이고, 해소의 문제는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문제'이다. 일례로 '신의 존재 여부(증명)' 같은 문제와 싸우는 것은 실천적으로 현명하지 못하다. 마치 변소가 없어지면 '달걀귀신'도 사라지듯이," 일정한 자기 삶의 양식에 충실해지면 해소되는 문제를 해결(풀이)하려고 골몰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래서 “문제 풀이는 반인문적이다.”

한편, 문제를 해소하는 실천적 지혜의 하나로서, “내가 문제보다 커져버리면 문제는 해소된다.” 즉, “인문학은 문제만 있는 경우는 없다. 내가 있기에 문제가 있다(된다). 즉 내가 신이면 문제가 없다.(인간에게만 문제가 성립된다) 일례로, 훌륭한 목사가 있는 교회의 신은 그만큼 크다.” 그런데, “‘기독교가 옳으면 불교가 틀린 것이 되고, 석가가 최고면 예수는 틀리다’는 식의 분법론적이고 인식론적인 발상에서는 문제가 계속 꼬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인식론적인 고착에서 해방되어, “문제를 풀려고만 하지 말고, 그것과 싸우면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  결국, “내가 커지면 문제도 아름다워지고, 내가 작아지면 문제는 계속 꼬이고 풀리지 않는 법이니, 각자 자기 문제를 아름다운 문제, 좋은 문제로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5-2. 흔히 상처의 문제는 “'아물다'와 '앓는다' 사이에서 사건이 기억되고, 용서나 기념탑 건립 같은 (이데올로기적) 상징행위들이 개입된다.” 그런데, “상처는 영원하다. 몸에 받은 상처는 그것으로 끝이다. 오로지 상처는 아물 뿐이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상처(기억)를 앓고 있는 우리들, “술을 마시면 빠르게 씻어지는 듯하지만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차를 마시면 천천히, 조금씩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5-3. 새로운 삶의 전략에서 강조되었던 '-α'전략과 관련하여 던지는 질문 하나, "백남준 방식으로 말해서, TV가 100대 있으면 내 삶이 더 나아질까?"


*<아주 특별한 손님>에 관하여,


5-4. “인간은 인간 밖에 산다. 즉, 나는 나 밖에 산다. 인간은 사이의 존재이다. 남과의 관계를 통해서 형성된다."(헤겔)

"'모른 체 하기'가 삶의 양식만큼 낮아지는 순간에야 '아는 것'이 비로소 제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은 인식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속도다.”('아주 특별한 손님'-k) 즉 “자기 부끄러움이 있어야 성숙한다. 당장 배운 것은 당장 써먹을 수 없다. 인식은 시간을 통하여 익는 과정(時熟, 시간의 비용, 모른 체 하기) 속에서 다시 올라온다. 부끄러움 없는 오만한 지식은 인문학적 지식(앎)이 아니다.”


5-5. "우리는 타자의 체험을 통해서만 자신을 변화시킨다."('아주 특별한 손님'-k) 그리고 “인문학의 공부에 있어 체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타인을 통해서만 변한다. ‘인간의 모든 욕망은 본질적인 것이 없다.’(지라르) 즉 오염/전염된 것에 불과하고, 모방의 네트워크에 불과하다. 영화에서 보면, 보경은 연극을 하고 나서(연극적 욕망을 통하여) 엄마에게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결국, 인문학은 '내가 어떻게 누구에게 손을 내미는가?'라는 것이 공부의 요체이다.” 


5-6. "이 영화는 '타자라는 시간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레비나스식의 포맷에 쉽게 얹힌다."('아주 특별한 손님'-k)  레비나스의 경우, “'나'는 생각의 막으로 갇혀있고, 그 외부는 대상, 물화, 스펙터클로 존재한다. 미래에서 다가오는 시간, 만남들이 생각의 막을 깬다. 이 때, 사건은 만남이고, 시간(메시아적 시간, 외상적 시간, 사건적 시간)이다.” 손탁의 경우처럼 “'질병'이란 시간을 통하여 타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들뢰즈 역시, “자기 생각(시스템)이란 무서운 반복이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 진보를 희망한다. 모든 인식은 재인식일 뿐이다. 이러한 반복에서 나오는 것은 시간과 만남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배우고 싶지 않은 욕망’(라캉)이 도사리고 있듯이, 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It is when we meet someone that we learn something.'(영국의 격언)라는 말처럼, 책도 읽으려하지 말고, 책을 만나야 배운다.” 또한 우리가 “하나의 체계가 전부라고 여기는 도그마 속에서 나오려면 시간(만남) 체험이 중요하다.”


5-7. “그러나 삶을 되돌아보지 않고 내다볼 때 사태는 일변한다. 일단 자서전적 회귀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수확하려는 본질주의적 욕심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대신 연극적 실천의 반복적 재구성이라는 기획을 통해, 우리의 남은 삶은 겸허하게 미래화한다.”(‘자서전이냐 연극이냐?’-k) 삶에 대한 태도를 구분하는 것으로, “자서전적 태도와 연극적 태도를 든다. 자서전적 태도는 삶이 유일무이하다는 생각이며, 과거적(되돌아보기)이고 정리, 마무리, 안정을 중시한다. 한편, 연극적인 태도는 삶이 체계화의 모방이며, 미래적(내다보기)이고 변화를 추구하면서 헌신적이다.”


*<여자, 정혜>에 대하여


5-8. “‘여자, 정혜’가 던지는 명제는 ‘상처받은 자는 위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자의 상처는 철저히 은폐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주인공은 상처의 기억에 고착되어 매우 수세적이고, 수동적인 안정화의 삶의 양식을 보인다. 이 영화에서 먼저 논의해야 할 주제는, 상처받은 자(정혜)는 어떤 삶의 양식을 보이는가, 이다. 몇 가지를 열거한다면, 1)‘그냥!’ 산다는 것  2)(무언가) 돌봄  3)수세 감정(씻는 행위)  4)알람, 경고음(상처의 환기?) 5)말이 없음 등이다. 특히 상처받은 여자에게 더욱 말을 못하게 하는 사회적 장치들이 작동한다는 것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름 없이 지내던 여자 주인공의 이름, ‘정혜!’가 호명되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또한 영화 제목도 ‘여자, 정혜’란 점을 주목해본다면, 초기 익명성의 상태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찾으면서 주체화돼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알튀세르는 말한다, ‘인간은 호명 대상을 항상 요구한다.’ 따라서 이 호명이 갖는 조건과 한계에 대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5-9. 상처를 응대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1)‘알겠다!’가 아니라 ‘모르겠다!’는 태도

2)‘we’를 죽이라

3)(시간을) 기다려라

4)곁에 있어주는 것 정도

특히, (선의이겠지만) 알량한 자기 생각과 지식을 헤집으면서 섣불리 나서지 말라!고 주문하신다.


5-10. 이제, 우리의 공부 과제는 “상처받은 자가 어떻게 생활양식을 만들고, 또한 어떻게 주변의 도움을 받으며 자기를 주체화하는가, 그리고 내가 어떻게 누구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가”란 점이다. 특히 후자의 문제는 동무의 존재가 비로소 얼굴을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


5-11. 강의 종료 후, 몇 분과 함께 (방파제를 섞은)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으며 강의에서 못다 한 영화이야기로 대화의 꽃을 피웠다. 그리고, 또 몇 분은 장쏘공에서 차를 마시며 9시 30분까지 환담하였다.  이날 우리는 모두 수십 개의 ‘방파제’를 먹었다!



제6강 알랭 바디우의 <윤리학>


먼저, 복습의 내용을 정리하고, 이어서 바디우의 <윤리학> 강의 내용을 정리하겠습니다.


6-1. 주체의 형성과 관련하여 "learn은 think가 아니다. 그것은 meet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남 속에서 서로 충돌하여 상처가 생기고 그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주체가 형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책을 본(읽는)다고 주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단지 책을 읽으면 소화되는 것이고, 자기 세계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책과 부딪쳐야 자기체계를 흔들 수 있으며 주체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6-2. "지난 시간에 언급되었던 내용에서 '내가 문제보다 커져버리면 문제는 해소된다'는 말이 자칫 개인주의 철학으로 환원될 소지 및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를 다시 정리하자면, 인간은 완악한 동물이라 쉽게 변하지 않는다. 또한 역사적으로 시도되었던 인간 개조는 모두 실패하였다.(우파든, 좌파든 마찬가지) 그렇다고 시스템에만 신경을 써서도 안된다."

한편, '교환 방식'을 살펴보면(k), 

1)뺏어먹기: 약탈, 전쟁(국가, state)

2)주고받기: 호혜성, 전근대적 농촌 경제(nation, 땅이고 피)

3)바꾸기: 시장(market)이며,

"미래적 전망을 꿈꿀 때, 주로 이런 3가지 방식을 추구하지만, 또 다른 제4의 방식(동무, 코뮨 등)이 존재 가능하다. 이것은 제도(체계)만 가지고는 안되고, 더불어 현명한 근기, 슬기를 갖춘 생활양식이 필요하다." 오로지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문제보다 커져버리면 문제는 해소된다’는 말이 이해되어야 한다. 결국, 체계 + α(근기, 슬기의 생활양식)라 하겠다!


6-3. "스피노자의 구원이 '생활양식을 통한 복종'인 점에서, 나는 일종의 스피노자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 의도, 호의가 아닌, 이것 밖의 생활양식만이 '확실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심리주의가 문제인 것이지, 심리학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6-4. 오늘의 공부 주제는 ‘새로운 윤리학’, 즉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라 하겠다. '주체를 형성하는 3가지 방식'을 통하여 공부 갈래를 파악해보자.

"1)'정혜' 같은 방식: 과거적인 방식으로 고착되고 응축하는 방식이다  아도르노의 지적처럼 '항상 상처는 어리석다.' 그래서 응고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서전적 삶으로 빠져든다. 결국 이 방식은 개인적이고 실체적인 방식이다.

2)종교의 방식: 집단적이고 상징적이며 의례화(반복)하는 방식으로 종교의 형식을 띤다.

3)바디우 방식(제3의 방식): 사건, 진리, 충실성, 생각이 상호 연동하면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된다." 여기서 제3의 방식(바디우)이 우리의 공부 주제이며,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아프기도 하고, 문화 및 종교를 탄생시키기도 하며, 구원을 찾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사건’을 경험한 후에 이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바울의 위대함은 '인생의 생산방식은 생활양식을 통한 근기나 슬기'에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철저히 죽이고 자발적인 복종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위대해졌다.”


6-5. “바디우의 '사건'이 주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이유(배경)는 무엇일까? 진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서양사상사를 살펴보면, 고대․중세의 플라토니즘으로 이데아-초월적인 무엇, 인간 밖의 것, 의식의 재현능력의 밖-의 세계와 근세의 인식론-데카르트 이후의 의식의 재현능력-으로 구별된다. 한편, 현대에 와서는 다시 인간의 몰락(인식론의 한계)을 겪으면서 '사건'을 통한 진리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즉 인간과 진리와의 관계가 바뀌면서 나온 개념이 '사건'이며, 바디우의 이론이다.”

정리하자면(k),

1)이데아(플라토니즘): 초월적인 것, 의식의 재현능력의 밖

2)인식론(근세 이후): 주체의 힘으로 진리 파악(의식의 재현능력 인정)

3)사건(탈근대): 외상적 충격을 통해서 진리와 만남, 진리의 도래(새로운 주체의 형성)이고,

다시,‘사건’ 개념의 출현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핀다면,

1)실체: 형이상학(고,중세), 합리주의자(근대), 실체로서 진리와 관계 맺으려고 함

2)사태(현상): 경험주의자(근세 이후), 고정된 실체보다는 현상이 중요

3)사건: 탈근대, 도래하는 진리와의 만남(개인 능력과는 무관함)

"즉 1)실체와  2)현상의 공통적 성격은 인식론적, 개인적(개인의 능력-이성/감각-으로 파악), 주체는 사람, 인간이 주체의 힘을 가지고 진실을 본다. 그러나, 3)사건의 특징은 탈인식론적, 탈개인적, 주체가 분명치 않음(생산물, 사건도 가능), 신비한 느낌, 기독교적, 새로운 주체의 형성이다."  


6-6. “'사건' 개념은 보통 '그냥 온다'고 말하나, 그것이 애매하고 주체가 선명치 못하고 약간 신비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기독교적'(메시아주의적)이다. 이와 유사한 주장은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 벤야민에게서도 확인될 수 있는데, '사건(존재, 진리, 음성)이 온다'고 한다."

"사건은 자기 생각이 무너지는 것이 기본이다. 즉 자기 고집, 자기 생각으로 세상을 보는데 이것들이 무너지는 사태에서 사건이 등장한다.“


6-7. 스승인 알튀세르와 제자 바디우의 차이점(k)

1)알튀세르의 이론 

“체계 내 사회적 약자들은 자기 생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공적 담론과 혼동하게 된다. 강자들의 체계가 호명해주면 개인들은 그 호명을 받고 착각하면서 주체를 만들어낸다.(착각효과) 즉 강자들의 이데올로기가 주체가 돼서 개인을 호명함으로써 주체를 재구성하는 양식을 취한다. 이때의 호명 방식은 애매한, 복합적, 중층적, 제도적, 인습적, 무의식적 방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주체가 재구성된 자들은 진리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이데올로기적 허위의식을 갖게 된다."(주체는 수동적, 부정적, 체제 굴복적, 반개인적임)

2)바디우는 스승과 달리,

“사건을 만나서 자발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충실하게 삶을 살아가면서 주체화된다. 진리가 생활양식을 통하여 구현된다고 본다.  그의 주체는 미래적, 능동적, 생활양식을 통한, 시간적, 긍정적(그 이유는'사건'이 메시아적이기 때문에)인 성격을 지닌다.“


6-8. 한편, “상황(체계적, 안정적, 이데올로기적) 속에서의 지식의 틀을 깰 수 있는 것은 '사건'(새로운 것, 메시아적, 진리)과의 만남에서 가능하며, 그 가운데 '+α'(여분, 잉여적 부가물)가 형성된다. 이때 잉여적 부가물을 보듬고 일관되게 나아가는 것이 충실성이고, 여기서 개인은 주체화된다.”


6-9. “철학의 중요 화두가 ‘주체’인 점에서, 바디우를 배우자. 즉 ‘제한된 맥락에서 변화된 주체를 모색해보라’는 뜻이 바로 (우리의) 공부의 요체인 것이다. 그래서 던지는 질문 하나, ‘어떻게 생산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바디우의 철학은 기본적으로 인식론이 아니다. ‘무엇을 안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라. ‘앎은 절망’(레비나스)이고, ‘앎은 부정적 자기 한계’(비코)일 뿐이다.  또한 칸트는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에서, 자기 생각 속에서 열심히 고백하고 기도하는 신앙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자기의 윤리적 실천을 통한 신앙을 강조한다.”  

“현대 윤리학의 한 갈래로서 담론 윤리학 혹은 의사소통의 윤리학은 인간 사이의 소통과 합의에 의한 윤리의 실천을 이야기하지만, 바디우는 인간 사이의 만남 가지고는 안되고 사건과의 만남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즉 소통/교환이란 상징으로부터 벗어나 실재세계(사건)를 만나고 싶어한다.”


6-10. 바디우에게 있어 ‘악’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그는 악이 없다고 본다.(기독교적 발상) 즉 선만이 실재이고, 악은 단지 선이 결락, 왜곡, 비틀림, 실패한 것 정도로 본다. 한나 아렌트도 ‘악은 진부한 것’으로, 엘리아데는 ‘선은 실재적인 것, 중심에 있는 것이나 악은 그것에서 벗어난 어떤 것’으로 규정한다. 결국 악은 그 자체 고유한 힘을 갖지 못한다.”


6-11. "요즘의 세태와 관련하여 경계해야할 것은 ‘자유의 자가당착’이다. 자유의 무제한적 개방성은 몰락하여 자본과 에고이즘에 탐닉하면서 자본주의와 인간의 이기심만 증폭시킨다. 즉 자유는 자본주의에 기여할 뿐! 그렇다면, 바울이나 엥겔스처럼 맹목적으로 충실하면서 잘 사는 삶은 무엇일까? 라캉이 프로이트를 충실히 따르고, 지젝이 라캉에 충실하듯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6-12. 마지막 정리,

“세속의 많은 경우, 꼭 옳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양식만이 존재한다. 즉 그것은 갈래와 다양체에 불과하므로 어느 한 갈래에서 열심히 살아가면 자리(터)가 생긴다. 세상은 대부분 우연의 효과에 불과하다. 그래서 삶의 많은 고민도 우연적 고민인 것이다. 결국 우연한 삶의 길에 충실하여 새롭게 조형해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특히, 삶은 전혀 인식론적이지 않다. 우연한 자리에서 충실하여 진정성을 얻어라.” 


질문 '사건'이 메시아적, 신비적 특징?


책에 사건의 예로 1792년 프랑스 혁명,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만남, 갈릴레오에 의한 물리학의 창조, 하이든에 의한 고전적 음악 양식의 발명 등이다라고 예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요. 정치, 사랑, 과학, 예술의 역사에 펼쳐진 말 그대로 사건들이네요...

07·06·01 19:26 수정 삭제

대답1.

부족하지만, 수업 중 제가 들은 것을 토대로 설명을 해보겠습니다.


여기서 <사건>은 <진리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진리가 되는 ‘사건’인데요, (아시겠지만) 그 ‘사건(프랑스 혁명,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 등)’이 <사건(진리사건)>일 때, 주체가 <사건>을 스스로 만든다거나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공백> 속에서 과잉(초과분)하여 출현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주체는 주어진 사건에 개입하는 <충실성>으로만 ‘사건’을 <진리사건>으로 만들어 갈 수 있는데요, 그 때에도 여전히 그것이 진리인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물론 주체 또한 스스로 주체임을 인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체가 꼭 사람은 아닙니다.)


이렇게, “존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의지나 예측 등을 벗어나며 상황 속에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전 상황과의 단절) ”는 의미에서 바디우의 <사건>을 <메시아주의적>이라고 해석하셨던 것으로 압니다.

이는 바디우의 <사건>이라는 개념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일 것입니다.

덧붙이면, ‘외부의 개입’이라던가 ‘초월적인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잡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07·06·02 02:07 수정 삭제

대답2.  우선, 제기하신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제가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소략하게나마 정리한 이 내용에 오류가 있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최종적으로는 선생님의 확인이 필요하겠지요. 다만, 현시점에서 보면, jy님이 수강하신 분인데, 정숙님이 문제삼고 있는 부분의 오류(정리자의 오류)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더구나, "이는 바디우의 <사건>이라는 개념에 대한 선생님의 '해석'일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볼 때, 일단 저의 정리 내용 중 "사건 개념이...그것이 애매하고 주체가 선명치 못하고 약간 신비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기독교(메시아)적이다."(정리 6)란 부분에 정리자의 오류가 있을 가능성은 적다고 전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전제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1. 선생님의 강의 내용 중, '사건' 개념에 대한 설명은 저도 "선생님의 '해석'이다."라는 jy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2. 강의에서 선생님은 바디우의 ‘사건’이 주체의 문제에서 중요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서양사상사에서 근세 이후의 인식론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인간과 진리의 관계가 바뀌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바디우의 ‘사건’ 개념이 등장한 것으로 설명하였습니다.(정리5)

또한 선생님은 바디우를 비롯하여 유사한 ‘사건’ 개념을 말하는 하이데거, 벤야민 등을 함께 소개하면서 원용하였습니다.

이러한 강의 맥락을 살펴본다면, ‘사건’ 개념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 수강 소견일 뿐이지만요.


3. 질문자가 언급하신 대로, 바디우는 '사건'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디우가 사건의 구체성을 예시했다고 하여 '사건'의 다른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바디우는 '사건'을,

1)"상황, 의견 및 제도화된 지식과는 ‘다른 것'을 ‘도래시키는 것'이다.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고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잉여적 부가물이다."

2)또한, "잉여 부가적이란 상황의 모든 규칙들로부터 절대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지요.

이러한 개념 설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건'은 명확히 포착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성을 띤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4. 질문자에게 답변이 충분했는지 모릅니다만, 저도 공부가 짧아 미흡한 점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정리 내용의 오류 여부는 다시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5. 사실 강의를 듣고, 자신이 이해한 것을 기록에 의존하여 재현하는 작업이 얼마나 신뢰가 있을지는 저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강의의 대화적 긴장이나 섬세한 맥락들을 살려낼 수도 없으며, 오히려, 자칫 선생님의 강의 내용을 왜곡할 뿐인 이 작업을 지속하는 것은 토요강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공부의 효과에 대한 작은 기대 때문이지요. 나름대로는 기록에 철저를 기하고 있습니다만, 오류의 가능성이 항존하기에 수강하신 분들의 적절한 지적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작업은 전적으로 제 개인적 관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립니다. 



제7강


오늘의 공부는 색다른 진행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복습 시간은 선생님의 예기치 못한 제안으로, 제가 지난 강의의 정리 내용을 가지고 바디우의 철학 등을 이야기했고, 2)‘철학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왔는가?’에 대한 수강자들의 발표, 3)로봇 주제의 영화이야기(박성종 의사의 발제 및 선생님 강의)로 다채롭게 진행되었습니다.


7-1. 지난 시간의 복습과 관련하여 선생님은, "사건은 사상사적 맥락에서 설명된다. 개인의 진리체험 방식의 문제와 더불어 주체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진리체험 + 주체화(개별화)가 연동되어야 ‘사건’으로서 의미가 있다. 한편, 구체적 ‘사건’도 중요하지만, ‘왜 사건이 문제가 되는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7-2. "사상사적으로, 1)합리주의는 실체를 대상화시켜서 이성적 직관을 통하여 파악하고, 2)경험주의는 감각을 통하여 귀납적으로 대상을 파악해왔다. 이는 모두 인간중심적이며, 의도, 생각, 의식 중심의 인식론이다. ‘사건’은 바로 여기서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서양사상사를 알려면 기독교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서양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사건중의 사건(완벽한 사건)’은 ‘재림’(메시아의 도래)일 것이다. 그들에게 인간이 바뀌거나 구원받기 위한 조건은 ‘메시아’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과학주의이고, 개인주의이다. 우리는 체계가 완고할 때, 체계 밖을 꿈꾼다. 즉 사건을 욕심낸다. 마치 잘 구획되고 닫힌 체계인 군대에 가면, 편지나 면회 등 새로운 사건이 다가오길 상상하듯이. 이런 맥락에서, 바디우의 (사건의) 경우, 꼭 이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메시아적 ‘기미’정도로 읽을 수 있다."


7-3. "인식은 무언가를 숨기거나 속인다. 따라서 통합적인 방식의 실천적인 지식을 꿈꾸게 된다. (빛과 어둠처럼) 인식이 도드라지면 주변이 어두워지거나 숨거나 한다. 나찌는 머리가 좋은 놈들, 합리성만 있는 종자들이다. 즉 감성, 육체, 정(情), 감정이입이 없는 존재들임을 기억해보라."

이러한 맥락에서 <이종범, 혹은 내야수의 긴장>(공부론2)을 읽어나간다. 이제부터 이것이 교재이다.


7-4. "나는 의식 없이 글을 쓴다. 기승전결을 따로 구성하지 않는다. 머리로 고안한 방식의 기승전결이 아니라, 체감과 감성, 직감 등 몸 자체가 글과 함께하는 것이다. 알량한 관념에 사로잡히면 변덕을 부리게 된다. 여기서 타자로 나가는 방식이 무엇인가? 이것이 안되면 ‘똑똑한 로봇’으로 끝나는 기능주의적, 체계 순응주의적 존재에 고착되고 만다. 진정한 실력은 현장의 체험, response한 상태에서만 나온다. 즉 이것이 대화적 실력이고, 실천적으로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지혜이다. 이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스승인 것이다. 그는 문사가 아니라 지극히 무사적이다. 반면, 문사들의 논쟁은 거의 게임이고, 공치사,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다."


7-5. "이종범은 유기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야구를 하는 그야말로, 야구를 이해한 사람(선수)이다. 지젝이 말하는 ‘습관성의 자해’처럼 야구에서 홈런의 욕망도 이와 유사하다. 자해행위가 상징적으로 정리된 세계에 모멸을 주듯이, 홈런을 치면 주어진 게임 내에서 윤리가 형성되지 않는다."


7-6. 이어서 토요강좌가 후반(7강)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간단한 소결의식을 거치게 되는데, 각자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답하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수강하신 분들이 선생님의 강의를 통하여 ‘철학이 나에게 무엇으로 다가왔는가?’를 고민하면서 소감을 발표하였다. 다양한 자기표현 속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이야기는 ‘철학이 단순히 철학사적인 지식(이론)의 나열이란 인식론적인 것만이 아닌 새로운 주체 형성의 문제, 혹은 생활양식의 문제로 다가왔다’는 점이다. 아마 이 주제는 강좌 내내 선생님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공부의 핵심인 셈이다.


7-7. 선생님은, "‘일상에서 사소한 것은 없다’는 점을 실천해보라. 나에게 ‘냉소와 허무’는 없다. 일상의 무엇이든 근기와 충실성, 열심을 가지고 생산성을 내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신다.


7-8. 한편, "야스퍼스는 공부 방법으로 3가지를 제시한다.

1)철학사(사상사)를 공부하라

2)당대 과학사를 이해하라

3)청렴하고 양심적인 삶을 살라

여기서 과학사의 이해를 강조하고 있음을 주목해라. 그리고 ‘전문가의 말’은 나름대로 어떤 식의 비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쉽게!’만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일반적으로 과학자의 말은 이해를 하지 못해도 용서가 되는데, 인문학자의 말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깊게 새기고 반성해야할 현실이다. 인류가 낳은 좋은 결과물(문명)들은 좋은, 일관된 근기와 끈기에서 나왔다. 쉬운 인문학만을 요구하는 세태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7-9. "자본주의는 일정한 생산성과 합리화를 요구하지만, 우리의 공부하는 모임은 ‘다른 관계’ 속에서만, ‘다른 상상’과 ‘다른 생산성’이 나온다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가정/회사’라는 코드(화)에 내 사고를 귀속시키지 못한다. 그 사잇길을 트게 되면 다른 관계, 다른 생산성이 나온다고 본다. 즉 제3의 사잇길의 관계에서 다른 상상이 가능하고, 다른 생산성이 나오는 것이다."


7-10. 오늘의 강의 주제인 영화에 관한 선생님의 강의에 앞서 박성종 정신과 의사의 짧은 발제가 있었다. 요점은, 로봇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의 우월성/독특성(유니크함)의 논쟁점에 관하여 정리하였다.


7-11. “영화에서 묵시록적 느낌을 주는 대목은 마지막 장면인데, ‘더 이상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인간의 유니크함을 논의하는가? 베이컨은 ‘시간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진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문제는 진화론적인 맥락의 가치/진리인 것 같다. 인간이 공가능성(동시명령 수행능력) 을 지닌 존재인데, 이제 로봇도 동시명령을 수행하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어느 순간 기계에게  퍼지 영역, 동시 다발적 영역, 애매한 영역이 생기면 드디어 ‘변덕’이 발생한다. 이제 로봇이 변덕을 부릴 때, 문제가 시작되는 것이다. 기계가 변덕을 부리는 급속한 진화를 보일 가능성이 엿보인다. 분명히 인간을 능가할 것이다. 곧 인간이 박멸될 것이다. 진화론적인 맥락에서 로봇이 인간을 억압하거나 노예화시킬 것이다. 즉 로봇의 진화적 우위와 계급적 차이가 발생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인간만을 가지고 생각해왔으나, 인간이 없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신(神) 현상도 인간을 전제한 현상일 뿐이다. 다시 한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더 이상 인간은 없다!’"


7-12. 강의마치고, 선생님을 비롯하여 수강생 10여 명이 함께 식사하고, 이어서 장쏘공에서 분위기 있는 차와 음악, 그리고 ‘철학적’ 대화가 12시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에 김동균씨가 멀리 강릉에서 방문하여 기념으로 곡차까지 곁들였다.

선생님은 대화 중, 기계의 발달, 자본주의의 편리함 등과 관하여, "없는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있는 행복의 수준을 죽이는(낮추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과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쾌락이어야 하지 몸이 감당하지 못하는 쾌락은 의미가 없다. 그것은 몸을 위한 쾌락이 아니고, 쾌락을 위한 쾌락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견해를 밝혔다. 또한 "지나친 편리함의 추구는 소수의 가진 자들을 위한 것에 불과하며, 결코 함께 나누지 못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편리함은 곤란하고, 분배와 평등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제8강 밀란 쿤데라의 <농담>


8-1. "바디우의 경우, 보수성과 급진성이 조화된 이론으로, '다른 관계'에서 '다른 생산성'을 도모할 때,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준다."

"'없는 관계'를 꿈꾸려니 기존 코드와 어긋나고, 가족/회사 관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8-2. "동무란 일종의 ‘상상력의 길’이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같은 낭만주의 발상으로는 안된다. 즉 구체적 사유의 길을 추구해야 한다. ‘없는 관계’는 구체적 관계 위에서야 결실이 가능하다. 다른 운신과 욕심에서 새로운 상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가령, 예술적 진보가 무엇인가? 예술은 자본과 체계와 연동하면서 반예술, 무의미한 예술이 판친다. 오직 이름의 힘만을 빌린 ‘변주’만으로는 안된다. ‘상상의 길’을 통하여 없는 관계나 자생력을 가질 때 문화/예술의 진보가 가능하다. 같은 어휘, 같은 관계 속에서 살지 말라. 결국, 동무론은 이념적 지형이 아니라 구체적 상상의 길로 이해된다."

"애인, 아니면 타인(누이)의 관계(2분법적)에서는 상상이 안된다. 애인과 타인, 그 사잇길이 곧 상상의 길이고, 동무의 길이다."

"흔히, 인간관계에서 에로티즘, 인정, 상상 등을 억압하면 물화에 불과해진다. 전태일은 ‘나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좌파는 물화와의 싸움이다. 물건처럼 사람을 만나지 말자. 견고한 자본주의 체제에서 발본적 방식이 없으면 쉽게 물화된다. 현재의 모습에서, 여성은 자발적 물화로 빠져들고, 남성은 기능주의적 물화 속으로 빠져든다. 제유법칙처럼 총체적 이해가 아니고 부분적 대상에 자신을 맡긴다."


8-3. "변화’와 ‘변덕’의 개념을 공부에 사용한다면, 공부가 나를 지배하는 경우는 ‘변화’이고, 자신이 공부를 지배하는 경우는 ‘변덕’에 불과하다. 지금의 세태에는 공부가 ‘사건’으로 다가와서 자기를 사로잡지 못하고 있다." 

"내가 관심 갖고 있는 동무의 욕심은 오래 마음을 두고 관계를 꿈꾸는 것이다. 어떤 '인연이나 사건'이 계시한 이치에 맹목적일 정도로 길게 가야만 생산성이 가능하지 않을까? 때로 동무나 공부는 허황해 보이기도 한다. 체계가 팔아먹을 수 있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쓰임새도 없고, 환전도 안되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불안정한데, 각자 충실성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따라서 변덕의 문제는 자본주의적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8-4. "체계는 (자신) 밖의 관계를 체계 속으로 내재화시키려고만 한다. 이것이 인정이고, 세태이다. 우리는 체계가 구획한 대로 살아간다. 하루 3끼의 식사도 체계의 문제로서 자본주의 사회구조를 잘 돌리기 위한 체계의 요구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자기 몸의 방식으로 먹지 못하고 있다."  


8-5. 최근 선생님의 글의 비판과 관련하여 주목해야 될 지점은, “‘관용의 사회’란 이데올로기 속에서 사상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생활양식이 다르면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곧 “글만의 비판이 아니라 거기엔 ‘인정의 문제’란 역사가 있을 것이다.”


8-6. "<농담>이란 소셜은 ‘세속’의 개념과 유사성을 지닌 주제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어긋남'을 다루고 있다. 의도, 호의, 결심의 어긋남의 문제는 새로울 것은 없으나, 독특한 구라파 상황과 연결되어 있어 흥미롭다."

"‘어긋남’, 인간 사이의 필연적인 어긋남은 인문학의 중요한 주제이다. 라캉은, ‘인간의  대화 가능성은 오해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대화는 어긋남의 물매효과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은 오해를 주고받는 기이한 동력을 가지고 움직인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이 어긋남을 조장하지만, 소설 <농담>은 역사, 운명, 체계가 인간의 근본적 어긋남을 조장한다."


8-7. '농담'과 관련하여, 경직된 체계가 한 사회의 언어를 전유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질문에서 선생님은, "쿤데라는 카프카의 영향을 받아 물화시키는 관료제와의 싸움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사회는 '말이 풍성해지는 사회'(로티)이다."


8-8. "쿤데라의 소설적 정신 3가지, 1)복잡성의 정신, 2)연속성의 정신, 3)불확실성의 정신이다. 이어 쿤데라는, '인간의 비극의 발생은 너무나 많은 문제에 답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소설적 지혜는 답을 하지 않고 질문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하이데거의 영향으로 실존에 관심을 가진다. '소설은 심리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것이고, 실제가 아니라 실존의 탐구, 실존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세속의 어긋남'을 주제화시킨 것이 소설 <농담>이다."   


8-9. 질문하나, "쿤데라는 비관주의적 역사철학을 제시한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모든 것은 고쳐지지 않는다'는 대목을 여러분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나는, 잊혀지지 않고('알면서 모른 체 하기', 바디우의 '무관심한 관심', '하얀 의욕'처럼) 변화하는 방식의 삶이 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쿤데라를 비판한다. 기억하면서 '한'을 품는 것이 아닌, 즉 과거 지향적, 심리주의적, 자기 파괴의 방식이 아니라, 상처가 범접하지 않는 미래적, 생산적 복수 같은 것. 심리도 아니고, 사건의 충실성을 삶의 양식을 통하여 '하얀 의욕'으로 나아감이다. 복수를 넘어선 복수랄까?"

"루드빅과 제마넥 사이의 복수에서도, 루드빅은 제3의 방식으로 주체의 재구성, 삶의 양식을 통한 미래적 복수의 길로 가야한다. 이것이 진정한 복수라고 본다. 이 때, '알면서 모른 체 하기'는 망각이 아니고, 무관심해야 관심이 생긴다는 말과 유사하다. 주체는 가만히 두고 욕망만 추구해서는 안된다."


8-10. "어긋남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즉 의도 속에 진실은 없다. 베드로의 의도는, '배반하지 않겠다'는 것이나 결국, 자기 생각일 뿐이다. 타자를 만날 때, 자기 생각이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예수와 대면할 때는 배반하지 않다가 예수가 없는 군중 앞에서는 배반한다."


8-11.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허영'은 내가 original하고, authentic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개종'은 나도 무리 가운데 산다는 것(남들과의 영향 속에 산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한번 만지면 인간은 물든다. 그럼에도 많은 경우, 영향 받았음을 거부하고 자기의 독창성인양 내세운다."

"대화적 실력은 바로 역동적 관계를 맺을 때만이 생성된다. 내 진실은 상호연관성 속에서 확인되고 증명된다."


8-12. 선생님은 "개인적으로, <농담>을 사랑이야기로 읽어도 좋다고 본다. 즉 사랑에 대한 우울한 고백(사랑의 역설)들에 주목해보는 것도 시사점이 많다."

'왜 사랑이 증오인가?'라는 질문. "중국의 선비가 한 기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기녀는 선비에게 '선비님께서 만약 제 집 정원 창문 아래서 의자에 앉아 백일 밤을 기다리며 지새운다면, 그때 저는 선비님 사람이 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99번째 되던 날 밤 선비는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를 팔에 끼고 그곳을 떠났다."(<사랑, 그 환상의 물매>)

"이 고사에서 선비는 왜 99일 밤에 떠났는가? 여기서, '그리워'하면서도 철저히 증오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1일의 편차를 이용해 마침내 복수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사랑은 값이 비싼 노동(비용)이다. 즉, 이러한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그 비용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증오심을 불러온다. 따라서 상호 평등함을 조형하는 기든스의 '합류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8-13. "'동무' 개념은 인간 사이의 어긋남의 체험에서 나왔다. 이 소설 <농담>도 삶의 복잡성과 어긋남의 주제가 의미 있게 다루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주목해보자."    


8-14. '성숙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선생님은, 성숙이 '관계적인 것'(개인적인 것이 아님)임을 설명하신다. "성숙도 역동성이다. 필요할 때 말을 하지 않기(끊기), 섬세하게 주시하면서 참아주기처럼. '자기가 아는 것을 다 말하는 것은 남을 지겹게 하는 짓이다.'(서양 속담) 이처럼, 자기 혼자의 미덕은 없다. 마음의 미덕은 담지 못하는 법. 즉 관계 속에서만 미덕은 증명된다."

"또한, 자기의 사랑을 건사하는 방식과 타인과의 관계가 병진돼야 하는데, 남을 처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사랑 주변에는 시기, 질투 등 온갖 파괴적 감정이 번식한다. 그러므로 사랑할 때, 자기의 성숙을 증명해야 한다. 사랑의 과정에서 동무관계나 우정관계를 증명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다."


제9강 <바벨 / 밀양>


9-1-1. 자본주의 체계에서의 물화: 자본주의와의 창의적 불화의 문제

“사회가 전문적이 되고, 자본주의?의 표피적인 현상 뒤에 숨은 물화(관계, 체계)를 짚고 나가야 할 것이다.”

선생님은 관계의 물화에 저항하는 2가지 방식을 소개하셨는데,

1)물화를 객관화로 보는 경우: 일반적 통념에 해당,

  “그 대안으로는, 내면화, 영성화, 주관화인데, 이런 싸움이 현명한 싸움인가? 결국에는 일시적 미봉책이다. 즉 물화를 단순히 ‘외면화’로 보는 경우, 바타이유처럼 내면화(내밀화), 영성화, 주관화로 나가는 것은 자본주의의 알리바이처럼 결국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것에 불과하다. 과연 물화가 외면화인가?”

2)부분화로 보는 경우: “한편, 루카치는 다른 방식에 욕심을 내는데, 물화가 ‘부분화’라면 전략은 다르다. 자본주의가 원래 패티쉬이며, 부분적 대상에 관심을 가진다. 즉 큰 구조, 체계는 보지 않고 부분적 기호, 관심에만 집착한다. 원자화된 부르주아는 자기 관심이나, 자기 이해, 자기 기호, 자기 소유처럼 부분적 대상, 즉물적 대상에만 관심을 가지는데, 이는 영성화가 되지 못한다.”

“따라서 사회전체의 구조와 체계처럼 전체 지형을 파악해야 한다. 즉 내밀성과 전체성(전체 구조) 모두에(동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싸움은 단지 외면화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화이기도 하다.”


9-1-2. “쿤데라의 <농담> 역시 ‘인간의 어긋남’에 관한 주제이며, 오늘 영화도 중요한 인간학적 테마인 ‘인간 사이의 어긋남’인데, 이 어긋남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경험하는 가운데 ‘무엇이 보이느냐’의 문제가 공부의 핵심이다.”


9-1-3. “다시 ‘개종’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야기 한다면, 지라르는 이 개념을 기이하게 사용하고 있다. 즉 관계의 문제이면서 실천성의 문제이다. 흔히, 관계에서 자기 생각이나 나르시스에 쉽게 빠진다. 그러나 개종은 자기 생각에서 나와 타자와 손을 잡으면서 자신이 체계에 개입된 현실을 반성, 혹은 인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경우, 관계의 진정성을 주장하면서 자기 알리바이에 빠진다. 새로운 관계의 형성은 개종의 아픔을 겪는 것이다. 즉 남과 사귀는 것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좋아하면서 일정한 증오가 싹트는데, 이것은 일종의 피할 수 없는 감가상각비가 아닐까? 농담, 실수, 오인이 세상에 각인되듯이, 상처, 오해가 각인되면서, 이런 것들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한편, 상처받은 자들을 이해할 때, 언어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말의 선점권을 남자에게 빼앗긴 여자들의 입장에서 관계 유지의 다른 방식이 있는가? 즉 연인 사이에서 언어적 비대칭성이 전제될 때, 어떤 응대의 방식으로 나아가(야하)는가? 이런 문제는 심볼릭한 권력 관계로 생각해봄직한 문제이다. 단순히 말수만으로 상대를 사로잡지 못한다.”

“과잉 남성화된 사회에서 인문학이 결절하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여성과 남성이 만나는 지점이다. 모든 이론/진보는 남녀 대화의 방식에서 증명된다. 원칙적으로, 남성이 탈남성화되면서 여성의 말을 배워야 한다. 여성의 감성과 언어적 능력을 잘 헤아려야 한다. 기든스는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즘-친밀성의 구조 변동>이란 책에서 남녀의 새로운 중성적 언어적 감수성의 계발을 주장하고, 친밀성을 기반으로 여성적, 동성애적 감수성을 보인다. ‘친밀감’에 초점을 두는 그는, 사랑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나, 나는 사랑도 ‘동무를 기반으로 한 새서사’를 꿈꾼다.”

“여성주의자들이 적대적 도발성을 이용하여 싸워야 하겠지만, 새로운 관계가 지향되어야 한다. 한쪽에서 남성적 ‘외디푸스 제국’을 건설하고, 다른 쪽에서 ‘여성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잇길을 모색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친구와 타인, 회사와 개인 그 사잇길에의 관심! 따라서 가부장제에 대한 여성주의적 적대 관계에 매몰되지 말고, 다른 관계를 꿈꿔보라.”

“모든 이론이 만나는 지점이 일상의 대화이다. 따라서 남녀의 대화 문화를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지배적 구조의 재생산의 체계 내에서의 말의 변주가 아닌, 기존의 제도, 관계의 근본적 수정이나 ‘없는 관계’가 새롭게 올라와야 한다고 본다.”

“남녀의 문제는 모든 사회의 근본 문제?이면서 마지막 투쟁에 해당한다고 본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성적 위치나 계급적 위치가 다른 경우에는 거의 절망적이다. 따라서 근본적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종의 비용을 치르자.”


9-2.<밀양>

<밀양>에서의 3가지 논의 주제: 1)용서의 문제, 2)딸의 입장, 3)종찬이는 무엇인가?


9-2-1. “다시, 용서는 없다”란 글을 통하여 용서 문제를 이해함

“‘용서가 없다’는 것은 용서의 불가능성의 문제이지 용서하지 말라는 윤리의 문제는 아니다.” 선생님은, 용서의 불가능성을 극복하려는 차원에서 자칫 영웅적 에고이즘(나르시시즘)에 기대려는 환상을 막기 위해 ‘약속’의 개념을 제시하신다. “약속은 탈심리화이며, 생산적 관계의 조형과 관련된 개념으로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다. ‘인간만이 약속한다.’(니체) 따라서 약속을 통해 인간만의 충실성(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다.”

“신애는 자신의 ‘의도’가 그 남자의 ‘생각’---그것도 신이 조형해준 그 생각의 벽---을 뚫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꽃을 던져버리고 실신한다.........그녀가 귀의한 신조차 그 바로 그 ‘생각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신애는 자기 생각에서 만나지만 곧 어긋난다. 이 영화가 기독교적이라 해석하기도 한다지만, “역설적으로, 이 장면에서 초월적 가상을 잘 증명한 셈인데, 다시 말하면 신이 없음을 잘 증명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면 신이 없는 것이다. 흔히, 상처와 관련하여 인간이 인간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자기 생각에 빠지는 뭔가가 있다. 그것은 초월적 가상(종교)에 빠지거나 나르시스에 빠지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빠질 때, 죽는다는 체험이 꼭 필요하다.”


9-2-2.“용서 문제의 기원을 살펴보면, 인류학적으로 복수가 순환되고 더 큰 폭력으로 확장되고 공동체 전체의 위협으로 다가오면서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복수의 제의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처럼, 원래의 복수는 종교적, 집단적, 공동체적, 제의적 행위이며, 이것이 곧 ‘희생제의’인 것이다.”


9-2-3.“복수는 문화, 제도, 절차가 되었다. ‘왜 용서는 없는가?’ 제도, 문화를 가지고는 몸의 상처는 치료되지 못한다. 즉 의례적, 상징적 절차로는 실재적 상처가 치료가 안된다. 만약 피해자가 ‘용서한다’고 하면 용서되는가? 결국, 이것도 언어이고 상징이고 장치에 불과하다. 따라서 상처는 계속 복류할 뿐이다.”

“이 영화는 신이 개입하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가로막는 현상을 보이고 있는데,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스치면서 만나는 화해적, 암시적, 미묘한, 미래적 ‘기미’를 보였다는 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한편, 인간의 무의식적 작동을 보면, 상징적 방식이 아닌 실재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풀어가려는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정치사를 놓고 볼 때, 이승만 독재가 끝나고 들어선 장면 정권은 절차적, 합의적, 토론적인 민주화된 모습을 띠었다. 이것은 ‘상징적인’ 것으로 현실적으로는 되는 것이 없어 보였다. 따라서 ‘실재적’ 메시아를 기대하는 ‘무의식’이 작동하면서 강력한 박정희 독재를 불러왔다고 볼(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독일의 경우 바이마르 정권의 무능 상태에서 히틀러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매우 리얼한 존재로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따라서 실재에 너무 의존하려드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다.”

“용서를 왜 해야 하는가? 개인들이 용서를 하면 누가 좋을까? 일반적으로 구성원들이 용서를 하면 체제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다.”


9-2-4.‘종찬은 누구냐?’란 질문에 대하여 수강자들의 반응을 보면, “괜찮은 세속 정도이다.” “종찬은 아직도 충실성이냐/단순히 욕망이냐 사이에 놓여있다.” “용서도 없고, 복수도 없다.” 등의 반응이었다. 선생님은, “사람은 비용인데, 일반적으로 지불한 비용은 되돌려 받으려고 한다. 종찬이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랑은 식는 일인데, 그 때 비용 반환을 요구하게 된다.”


9-2-5.유괴범의 딸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해자는 피해자의 상처를 보지 못한다. 즉 불능 상태에 빠진다. 이는 종교를 믿어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딸과 신애의 만남(머리를 맡기는 만남)에서 (상징적이 아닌) 실재적 화해의 기미를 보았다. 우리는, 상처 받은 자와의 만나는 방식의 조건이 무엇인가를 고민해보자. 딸이 신애를 만날 때, 정면으로 대면하지 못하고 스치면서 만난다.”

“대개, 마주보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런데, 이 영화(밀양)는 마주보는 것이 아니고, 비껴간 존재들(종찬, 딸 아이)을 통하여 세속의 진실들이 엿보인다는 점에서 인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 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바벨>에서도 마찬가지로, 의도 밖에서 복류하는 진실들을 살펴보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제 10 강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10-1. 물화 문제와 관련하여, "2가지 해석-'객관화'(외면화)와 '부분화'-에서 외(면)화의 경우, 대응 전략으로 내면화, 영성화, 종교화 등이 논의되어왔고, 더불어 인간의 고유한 내면성을 고집하는데, '과연 인간에게는 깊이가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여기서 이들이(바타이유 등) 전제하는 인간의 '깊이'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함께 가입했던 '체계나 제도의 원근법적 효과'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즉 원근법이 생겨나면서 깊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으로 '원근법적 착각'에서 깊이가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선생님의 이러한 설명을 듣고 나니, 인간 이해의 재구성이란 새로운 문제의식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인간 '내면', 혹은 '심연'의 깊이를 찾아 (종교적) 명상에 빠져들곤 하였으나, 그것이 환상의 나락으로 미끄러지고 만다는 진실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10-2. <농담>이나 <바벨>, 혹은 <밀양>에서 보듯이, "세속은 '어긋남'을 통하여 진실을 보인다. 즉 어긋남이란 '도달하지 못하는 오해'로서 라캉적, 카프카적 개념이다. 흔히 세속은 이 '어긋남'을 피한다는 것이다. 콘라드적(<암흑의 핵심>)으로 표현하면, 진실을 응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호의는 미끄러지고, 자빠지고, 실수하면서 무엇인가를 보이는데, '누가 이것을 볼 수 있는가'가 핵심 테마이다."


10-3. 열정의 문제를 논의할 때,

1) "인간은 무의식적, 심연적인 동물인데, 여기서 열정이 올라온다."고 보는 경우가 있고,

2) "지라르의 경우, 열정은 자기에서 오지 않고, 모방적인 상호연관성이 있는 이웃에서 나온다고 본다. 즉 만남의 역동성, 변증법적 ?을 통하여 열정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물화와 연관시켜서 고찰해봐도 의미 있는 일이다.


10-4. <밀양>의 종찬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볼 때,

"바디우에서 중요한 문제가 비사회성의 문제인데, 우리가 '진리사건'에 대하여 충실성을 보이면서, 각자의 독특한 생활양식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고독(비사회성)'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종찬이는 충분하게 고독/비사회성을 겪고 있는가? 즉 비용의 관점에서 그의 생활(행동)양식을 살펴보자."


이쯤 논의되면, 종찬이는 '괜찮은 세속'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


10-5. 주체의 재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명상처럼 인간성(내면성)의 탐구냐, 아니면 시스템의 문제로서 혁명적 방법이냐의 양극적인 전략 사이에 관계나 '생활양식' 등 다양한 접근과 시도가 가능하다."


앞서 논의했듯이, 인간의 '내면성'(깊이)에 대한 신뢰가 약하다면, 우리는 체계와의 문제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삶과 체계가 부딪치는 과정에서 응결되는 수위나 대응방식, 관계 등이 각자의 전략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전략의 일례로, 1) 혁명, 2) 전체성(루카치)의 문제, 3) 제도(고진), 4) 전통(가다머), 5) 생활양식(k)-체계와 창의적 불화-을 들 수 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각자 나름의 대응전략을 고민해야 하며, 그것이 곧 '주체의 재구성'이란 철학적 과제로 이어진다.


10-6. <방법서설>에 대하여

토요 강좌에서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다루는 목적은, "그의 개인적 주장(텍스트의 구체적 내용)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사상사적인 갈래나 분절, 맥락에 더 초점을 두기 위해서이다. 즉 데카르트를 '생각이 곧 존재'라고 하는 관념론자, 합리주의자로 보는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존적 위기의식'과 끝까지(?) 밀어붙이는 '의심'을 통한 근대적 주체 형성의 이력을 공부하는 것이 핵심이다."


선생님은 더운 날씨 탓인지 강의가 재미없고, 매끄럽지 못하다고 재차 말씀하셨음에도, 강의 분량은 어느 강좌보다도 많아 정리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그러면, <방법서설>을 통한 데카르트의 공부가 토요강좌에서 어떤 의의를 가지는가? 즉 선생님은 데카르트의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는지를 관찰하면서 정리해보자.


10-7. 우선, 공부의 내용을 크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1) <방법서설>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즉, 그의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2) 그의 위대성이 '근대적 주체의 형성'에 있다면,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는가? 즉, 그의 한계는 무엇인가? 탈근대적 관점에서 비판적인 지점을 찾아간다.

3) 그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어떻게 가능한가? 탈근대적 관점들과 관련하여 공부하되, 특히 선생님이 강조해온 '주체의 재구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한다.


위의 3가지 문제의식은 결국,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주체의 재구성'의 맥락 속에서 출발한다.


10-7-1. <방법서설>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가?


먼저, 데카르트를 읽는 요령은, "1) 체감하는 독서가 되어야 한다: 의심이란 끈질긴 작업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과 만나는 고된 실존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중세와의) 근본적 차이가 생겼다는 것을 느껴(체감해)야 공부가 된다.

2) 생각함의 무모성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 즉 데카르트는 생각의 자폐성을 비판하고 방법적 의심을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엿보는 작업을 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그를 읽어보자."


선생님은 "핵심적 근대성은 바로 데카르트의 '자기 준거성'(의심)에 있고, 이런 방식으로 근대적 주체가 형성되었다."고 하신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듯이, 종교는 자연의 인간화이고, 주술은 인간의 자연화인데, 이 단계를 벗어나 자연/세상 전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본 것이 데카르트이다. 즉 자연/세상 전체를 의식의 대상으로 마주 세우는 것이 그의 주체 형성이었다."


한편, "고대의 경우, 상상적 단계로서 주술적 나르시스의 상태였으며, 중세의 경우는 종교적 나르시스의 상태였다. 그런데, 근대의 경우는 이와 달리, 표상(인식)의 단계로서 내 의식(거울) 속에 대상 전체를 관념적으로 마주 세운다."


여기서, '주체'의 의미를 먼저 규정하고, 내용을 정리해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즉 자아와 주체를 구분할 때, "주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일관되고, 기본적인 태도나 관계 맺음이 형성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주체' 개념과 관련하여 시대적으로 일별해보면, "고, 중세는 미약한 주체(주체가 없는 미성숙의 상태)이고, 에고만 존재하는 아이의 단계라고 볼 수 있겠고, 근대의 경우는 대타의식이 형성되고, 나-너 구조와 관계의 주체이면서 의심의 주체인 어른의 단계이며, 현대(탈근대)는 주체의 해체, 즉 주체가 무너져 없는 양상이고, 새로운 어른 혹은 아이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설명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면(k),


1) 자아

상상의 단계(일치의 단계)--고, 중세

초월적 이데아, 신을 향하여 인간이 올라가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

(위로 지향하는 구조)


2) 주체

상징적 (대화) 단계--근대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연/세상을 대상화시킨다.

즉 인간이 주체가 되어 세상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고 표상적 긴장을 통하여 대등하게 인식한다.

(주체-대상의 수평적 구조)


3) 탈주체

실재적 단계--탈근대

무의식, 체계, 사건, 구조 등의 실재들이 인간을 찾아와 지배한다.

즉 실재가 경험론적 방식을 통하여 인간을 지배한다.

(아래로 지향하는 구조)


결국, 데카르트의 주체 형성과정을 보면, "체계 속에서 열심히 의심하고, 세상 밖으로 나와(여행 등) 세상 전체가 보이면서 주체가 형성된 것이다."

"세상(체계)과 나, 그리고 양자를 매개하는 매체, 이 3자 관계에서만 주체는 형성되는 법인데, 이 점을 처음 인식한 존재가 바로 데카르트였다."


아마, 데카르트의 위대성도 '생각이 곧 존재'라고 하는 관념론적 해석에 있다기보다는 세상과 마주하면서 주체를 수립한 인식론적 사건에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가 공부하면서 주목하는 점도 여기라고 선생님은 역설하신다.


이처럼, "주체는 미리 전제된 것이 아니라 세상과의 긴장이나 마주 봄으로써 비로소 형성된다는 점이다. 즉 주체는 체계와 싸움을 하는 양식과 매체를 선택하면서 형성된다. 데카르트도 세상과 분열되면서 주체가 형성된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개인주의적 부르주아들을 비판할 수 있다. "세속의 부르주아들은 체계 속에서 부분적, 즉물적 욕심만 가지고 산다. 따라서 전체(세상)를 보지 못하므로 주체가 형성되어 있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좌파들의 기본적인 비판이 시작된다." 자본의 소비적인 교환체계에 포박된 우리들 역시 즉물성에 함몰되어 언제 주체를 돌아볼 수 있을까?


오늘날, "상대주의, 차이 지상주의에서 나와 진보를 욕심낼 때, 준거나 주체가 필요하다. 즉 체계와 길항하면서 매개를 통하여 주체를 재구성하게 된다."


선생님의 경우, "자본제적 삶과 창의적 불화를 겪으면서 글쓰기, 산책 같은 '생활양식'이나, '동무' 등의 매체를 선택하면서 주체의 재구성 문제를 풀어간다."


이처럼, '주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매체의 선택'은 매우 중요한 요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