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산책

[스크랩] 쇼팽의 ?(즉흥)환상곡

강병현 2012. 12. 8. 00:17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 

 

1. Fantasie - Impromptu in C sharp minor Op.66
쇼팽의 즉흥환상곡 C Sharp Minor Op.66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1849)

즉흥곡이란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악곡을 진행하는 형태를 말한다. 쇼팽이 쓴 즉흥곡은 4곡이 있으며 <제1번, 제4번>이 유명하다. 특히 제4번 환상 즉흥곡은 1834년의 작품으로 ‘환상’이란 제목은 그가 죽은 후 붙여졌다. 그는 생전에 이 곡을 무척 아꼈으며 죽은 후에 파기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지금에 와서는 4곡의 즉흥곡 중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화려한 기교, 감미로운 선율이 매혹적이다.

 

곡은 3부형식으로 구성되어 주부는 처음 네 마디의 서주 다음에 왼손의 여섯잇단음표에 대해 바른손, 즉 고음부의 16분음표의 음상으로 조화되는 화려한 악장으로 시작된다. 리듬이 서로 다른 바른손과 왼손의 음형이 교차하는 가운데 생기는 일종의 환각이 주부의 주상이라 하겠다. 이 주부는 알레그로 아지타토의 2분의2박자이지만 중간부는 d플랫장조의 4분의4박자로 모데라토 칸타빌레라고 표시되어 있다. 중간부는 극히 감상적이며 아름답고 애수적인 선율이 여러 차례 되풀이 되어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이 중간부가 끝나면 다시 처음의 주부가 복귀되어 재현된다. 코오다는 중간부의 선율이 저음부에 회상되어 여운이 오래오래 남는 인상적인 효과를 낸다. 1834년 Chopin이 파리에서 작곡한 매우 감미롭고 매력적인 곡이며, 생전에 그 자신이 애지중지하기로 유명했던 곡이다. Chopin은 이 곡을 항상 악보 사이에 끼우고 다녔을 뿐 아니라 출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에스테 부인에게 헌정하려고 착수한 곡이라 추측하고 있으며, Chopin의 사후 유작으로 출판되었다. 곡의 흐름이 매우 감미롭고 아름답다. 쇼팽이 24세 무렵에 쓴 작품으로 추측되는데 최종 원고로 여겨지는 자필 악보(데스테 부인의 악보철에 들어있던 것으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소유하고 있었음)에는 "파리에서 1835년 금요일"이라고 적혀있다. '환상'이라는 제목은 그 때 붙여진 것이다. 쇼팽이 출판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아서 헤들리는, 모셸레스가 1834년에 낸 즉흥곡이 이 곡의 주제와 비슷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또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이 곡이 데스테 남작 부인에게 팔린 것(자필 악보에는 "데스테 부인을 위해 작곡"이라고 적혀있다)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폰타나 판은 초고의 필사보에 바탕을 두면서 폰타나가 직접 개정을 했기 때문에 최종 원고와는 상당한 차이를 낳고 있다. 작곡은 1834년 경, 최종 원고는 1835년(?), 데스테 부인에게 헌정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출판은 1855년. 센티멘털하다는 평도 있지만 복잡한 리듬에 신선한 요소도 들어있다.

즉흥곡 제1번 A♭장조 op.29 세도막 형식 Impromptu No.1 in A-flat major Op.29

1837년에 작곡된 이 곡은 다른 즉흥곡들보다 가장 맑고 깨끗한 곡이다. '환상곡'으로도 불리우는 이 곡은 조르즈 상드와의 사랑이 시작된 때에 작곡된 것이라서 그런지, 깨끗하고 밝으며 매혹적이다.


즉흥곡 제2번 F장조 op.36 Impromptu No.2 in F-sharp major Op.36
1839년의 작품으로 Chopin의 4개의 즉흥곡 중에서 가장 시적인 곡인데, 왼손만에 의한 꿈결 같은 악구로 시작되는 녹턴 풍 곡이다.


즉흥곡 제3번 G♭장조 op.51 세도막 형식 Impromptu No.3 in G-flat major Op.51
1842년에 작곡.. 첼로에 의해 멜로디가 노래한다. 코다의 화음적인 진행이 이 곡의 종결부를 긴장시킨다.

2. Fantasie in F minor, Op.49

쇼팽의 환상곡 F 단조

Frederic Francois Chopin (1810∼1849) 

 


환상곡 f단조 op.49

1841년 노앙에 있는 조르즈 상드의 집에서 작곡한 단 한 곡의 환상곡이며 쇼팽의 모든 작품 중에서 최고위에 속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당시 쇼팽은 상드와 열렬히 사랑하고 있었는데 이 곡을 만든 무렵이 그 절정의 시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리스트는 이 곡은 쇼팽과 상드의 사랑을 그린 것이라 말하고 있다. 곡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어느 날 상드와 언쟁을 한 쇼팽이 우울한 마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데, 상드와 화해시키려고 리스트와 플레이엘 부인이 찾아왔다.

불평을 호소하는 쇼팽앞에서 상드는 무릎을 꿇고 사과했다. 안심한 리스트와 플레이엘 부인이 방을 떠나자 드디어 쇼팽의 마음은 가라앉아 겨우 화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곡은 그러한 정경을 배경으로 작곡된 것이리라. 이 일화는 리스트가 쇼팽에게 들었던 이야기라고 바하만(유명한 쇼팽 연주가)에게 이야기했다고 하나 다분히 익살 같다. 혹은 쇼팽이 그러한 환상 비슷한 것을 품고 작곡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쇼팽의 걸작 곡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다. 순수한 아름다움과 신비감마저 느끼게 하는 환상곡이다.

곡의 형태는 같은 작곡가의 발라드와 극히 유사하다. 그러나 발라드는 모두 이야기의 줄거리를 말하는 음악에는 불가피한 3박자로서, 형식은 의심할 것도 없이 서술풍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쇼팽이 발라드와 같은 낡은 옛 전설이나 로망스가 아닌, 그 자신의 현실 생활의 심히 극적인 중대 사건을 말해주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 것은 스케르쪼와 같이 작자 자신의 개인적인 표현은 아니고, 작자가 그 속에 있으면서 일역을 맡고 있는 어떤 사건의 서술이다. 그리고 또 그의 폴로네이즈와 같이 폴란드라고 하는 좁은 향토적 감정이 아니라 일반적인 감정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http://mediafile.paran.com

 

 

 

 

 

 

 

 

 

 

 

 

 

 

 

 

 

 

 

 

 

 

 

 

 

 

 

 

 

 

 

 

3. Fantasy on Polish Airs in A, Op.13

폴란드 민요에 의한 환상곡, 작품 13 

 쇼팽의 나이 18살인 1828년 연주회용 론도 '크라코비아크'와 같이 작곡하였다.

환상곡은 1830년 바르샤바에서 그가 직접 초연을 하였고  '크라코비아크'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었다. 두 작품 모두 거침없는 비르투오적 곡이다. 

 

Piano, Kun Woo Paik / 피아노 백건우

Conductor, Antoni Wit / 지휘, 안토니 비트

Warsaw Philharmonic Orchestra /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판타지 (fantasy)

 

보통은 환상곡이란 표현보다 판타지라는 표현을 쓰다보니 백과사전에도 나오는 것이 쉽게 접근이 되지 않는 것 같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악상이 떠오르는 대로 자유로이 작곡한 작품. 보통 환상곡으로 번역된다. 이는 시대·작곡가·곡풍(曲風) 등에 따라 종류가 많으나 일반적으로는 다음의 5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즉흥적 성격을 띈 곡 : 모차르트의 피아노용 환상곡(D단조), 베토벤의 피아노용 환상곡(작품번호 77) 등
② 자유형식의 소나타 :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월광》, 슈만의 《환상곡》(작품번호 17) 등
③ 몽환적(夢幻的)·몽상적 분위기를 띈 낭만파시대의 소곡 : 브람스의 《환상곡집》(작품번호 116) 등
④ 오페라의 아리아 등을 계속해서 연주하도록 한 곡으로 자유롭고 즉흥적으로 처리되어 있는 것 :

    《돈 조반니 환상곡》 등
⑤ 16∼17세기의 기악곡 명칭 :

     엄격한 대위법을 따랐으며 후세의 자유로운 환상적 요소는 포함되지 않는다. 
    

 

쇼팽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 3. 1 - 1849. 10. 17

 

쇼팽은 폴란드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라스 쇼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사회적인 불안을 피해
북쪽 나라 폴란드로 이주했는데, 처음에는 연초 공장에서 회계 일을 하던 그는

공장이 폐쇄된 후 스카르벡 백작의 집에 프랑스어 가정교사로 머물렀다.
그리고 옛 귀족 출신 가정부 유스티나와 결혼, 1남 3녀를 얻었다.
그 가운데 둘째가 쇼팽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기초 교육을 받기 시작한 그는 12세 때 바르샤바 음악 학교

교장인 엘스너에게 정식으로 작곡 교육을 받았다.
엘스너는 쇼팽의 독창성이 충분히 발휘되도록 여러 가지로 배려했는데, 이것이
그로 하여금 피아노 작곡가로서 독보적인 인물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15세 때 그는 처녀작 ≪론도 작품 1≫을 출판했고, 18세 때 베를린을
방문해 유럽
음악계를 견문했다.
다음 해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 빈으로 가서 독주회를 열었다.
이때 슈만으로부터 "여러분,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하십시오.
여기 천재가 나타났습니다."라는 극찬을 받음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쇼팽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바르샤바 음악원 성악과 여학생인 콘스탄치아 글라드코프스카를 남몰래
사모하면서도 도저히 사랑 고백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고민 끝에 그는 차라리 그녀 곁을 영원히 떠나리라 마음먹고 정처없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살아있는 동안 두 번 다시 고국땅을 밟지 못했다.
그는 여러 나라를 전전한 끝에 파리에 정착, 음악가로서 지휘를 굳혀갔다.
 26세 때 리스트의 소개로 쇼팽은 당시 인기 절정에 있던 진취적인
여류 소설가
조르쥬 상드를 만났다.
그 때 이미 그는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기질의 쇼팽은 남장을 하고
엽연초를 피우는
6세 연상의 상드로부터 극진한 병간호를 받으며 작곡에 전념했다.
이들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공동 생활을 즐겼는데 이 곳에서 쇼팽의 병세는
악화되었지만 주옥같은 명곡들을 많이 작곡했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을 즐기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는 없었나 보다.
그들의 공동 생활은 1846년 그의 나이 36세 때 끝이 났다. 그 후 그는 생계를 위해

한 때 그의 문하생이었던 스털링의 초청으로 스코틀랜드에 갔다가 기후가

몹시 나쁜 그 곳에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병을 이겨내지 못한 그는 결국 3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그의 유해는 피에르 라세즈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언에 따라 심장은

모국 폴란드의 바르샤바 성십자 교회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일생을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 만든 6개의 관현악곡, 3개의 소나타 역시 빛을 발하고 있고, 즉흥곡,
녹턴, 마주르카, 왈츠, 폴로네이즈 등은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다.
새로움이 가득한 그의 곡들은 후대의 음악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정교함과 치밀한 악상을 독창적으로 사용한 쇼팽은 선배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출처 : 박연서원
글쓴이 : 박연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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