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 만들기

연봉 1억 토스트 노점상, 그 성공이야기

강병현 2007. 11. 11. 13:16
 연봉 1억 토스트 노점상, 그 성공이야기


성실하고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루 종일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성공은커녕 제 식구 끼니도 변변히 해결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벤처 사업가라 하더라도 대박은커녕 거리로 나앉는 사례도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치고 성실하고 창의적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사술(詐術)과 요행만으로는 일가(一家)를 이루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잠시 위세를 부린다한들 그것이 얼마나 갈까.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재료 준비를 하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그날 일어난 모든 일을 일지로 작성하는 성실함에다 다양한 메뉴, 독특한 맛, 정갈한 매장내부 등 유명음식점 못지 않은 창의적인 마케팅 전략을 구사해온 토스트 스낵카 노점상이 마침내 연수입 1억원을 기록하면서 ‘석봉 토스트, 연봉 1억 신화’라는 책까지 펴냈다.


대형 소핑몰에 자신의 이름을 딴 토스트 브랜드를 입점시키는 한편 전국 15개 체인점의 창업주가 됐으며 중국 현지에 직영체인을 개설하는 등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석봉 토스트’ 김석봉 사장(46)을 만나 그의 성공신화를 들어보았다.


-‘석봉 토스트’ 15개 체인점 창업주로-


서울 중구 무교동 45번지 코오롱 빌딩. 김석봉은 아침 7시면 자신의 0.8t 타우너 트럭을 몰고 이곳에 와서 토스트 스낵카를 연다. 말랑말랑한 식빵과 그 안에 들어갈 오이?양배추?당근?양파 등 잘게 썬 채소를 넣어 만든 달걀 반죽, 정수기로 걸러낸 깨끗한 커피물과 유통날짜를 확인한 우유, 뜨겁게 달아오르는 불판을 보면서 흰 가운을 입고 조리사 모자를 쓰면 일단 하루일과 개시 준비가 끝난다.


석봉 토스트로 아침식사를 하려는 직장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 때마다 그는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어느덧 그의 가게 앞에는 긴 줄이 형성된다. 그는 “손님들 대부분이 몇년 이상된 단골이어서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눈빛만으로도 안부인사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석봉이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것은 아니다. 전북 정읍에서 빈농의 6남2녀 중 여섯번째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그는 도둑질만 빼놓고 안해본 일이 없다. 자동차 정비소 견습공, 조선소?컨테이너 공장 노동자, 용접공, 과일행상, 공사장 막노동 등 극심한 육체적 피로가 수반되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1997년 3월 김석봉은 토스트 장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교까지 졸업한 그는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나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일거리가 없을까 고민중이었는데 토스트 장사는 안성맞춤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트럭을 몰고 간 곳은 지하철 3호선 녹번역이었다. 직장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지하철이 목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사흘 내내 허탕만 친 그는 다시 홍제역으로 옮겼고 이곳에서도 파리만 날리다가 좌판을 접어야 했다. 도심가까이 진출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는 했으나 당초 기대에는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3개월간의 실험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김석봉은 곧바로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무엇보다 주변 상권에 대한 철저한 사전분석과 치밀한 판매전략이 없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지하철역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안정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아무리 간편하게 때우는 아침식사라 하더라도 행인의 발길에 차이는 곳에서 마음놓고 토스트를 먹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아 늘 피곤한 상태로 일을 시작하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린 채 손님을 맞는 등 ‘과거와의 결별’에 실패한 것도 또 다른 요인이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원인은 ‘프로페셔널 정신의 결여’였다.


거리에 나가 토스트 장사를 한다는 사실을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했고, 그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고객 서비스나 창의성이 나올 리 만무했던 것이다. 김석봉은 “스스로를 일개 노점상으로 깎아내릴 것이 아니라 어엿한 사업체의 주인이라는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졌어야 했다”고 말했다.


-손님 하루 300여명… ‘중독 고객’-


상당수이러한 자기반성 끝에 자리잡은 곳이 지금의 무교동 코오롱 빌딩 옆이었다. 김석봉은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파는 ‘로드 비즈니스’의 생명은 청결이라는 점에 착안해 흰 가운을 입기 시작했고 토스트 만들던 손으로 돈을 건네받는 방식을 그만두고 손님들이 직접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보통 포장마차에서 쓰는 철제 그릴판을 스테인리스로 바꿨으며 두루말이 휴지 대신에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는 최고급 티슈 화장지로 손님들이 손을 닦을 수 있게 했다.


인근 호텔의 외국인들도 자주 들르는 것을 보고 메뉴판도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4개국어으로 표기했다. 손님들에게는 한사람 한사람 웃는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재료는 저칼로리 위주의 최고급으로만 선택했고 조미료와 설탕은 전혀 쓰지 않았다. 계란도 일반란이 아닌 값비싼 영양란을 사용했다. 김석봉은 “요즘 유행하는 웰빙을 이미 오래전부터 실천한 셈”이라고 말했다.


‘석봉 토스트’라는 브랜드는 자신의 이름인 동시에 조선시대 명필인 한석봉에서 따왔다. 한석봉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나는 떡을 썰 테니 넌 글씨를 써라’라며 글씨연습을 시켰다는 옛 이야기를 떠올렸던 것이다. 김석봉은 “손님들이 한석봉의 어머니가 썰어놓은 가지런한 떡을 생각할 것이라는 데 착안했다”고 말했다.


불량배의 행패와 당국의 단속이라는 노점상의 숙명이 그에게도 찾아오지 않을 리 없었다. 무교동 개업 초기 주변 불량배들은 심심찮게 찾아와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때려부수겠다”고 위협하며 돈도 내지 않은 채 토스트를 먹어댔으나 그는 다른 손님들과 다름없이 친절하게 이들을 대했다. 결국 불량배들은 “아저씨 토스트 맛이 대한민국 최고다”라며 물러갔고 그의 단골이 됐다.


인근 상가 업주나 행인들의 신고로 여러번 단속에 걸려 벌금을 물기도 했던 김석봉은 어느날 즉결심판에 넘아가 재판장 앞에서 최후진술을 할 기회를 얻었다. 그는 일단 자신의 노점이 불법이라는 것을 인정한 뒤 “시청 부근이라 외국인들도 많은 터라 청결과 위생관리에 최선을 다한 결과 무교동 5대 명물로 인정되고 있으며 일본의 여행가이드 북에도 올라 있다”고 강조했다.


판사는 “그 마음 잃지 말고 더 열심히 일하라”며 벌금 8만원을 부과했다. 김석봉은 “비록 불법 노점상이지만 나도 이 사회를 구성하는 아름답고 단단한 그물코라는 사실을 법원이 인정해 준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고 말했다.


-이웃돕기 큰돈 선뜻 “아직 전셋집 신세”-


아침 7시부터 11시까지 그의 가게를 찾는 300여명의 손님 가운데는 이미 ‘석봉 토스트’에 깊이 중독된 ‘환자’들도 적지 않다. 어느날 그는 한동안 뜸했던 단골 여성 한 사람을 맞았다. 여행사에 다니던 그 손님은 결혼한 뒤 직장을 그만두고 임신을 했는데 매일 아침 먹던 토스트가 생각나 분당의 집에서 달려온 것이었다.


토스트 두 개를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 그는 ‘소원 풀었다’며 몇 개를 더 포장해서 가져갔다. 일본인 단골 손님 한 사람은 그가 위암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일본사탕과 꽃다발을 보내왔다.


매월 순수입 8백만원 남짓, 연수입 1억원의 고소득이지만 김석봉은 아직 전셋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업투자도 많이 하지만 기본적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기 때문이다.


아침에 마련한 재료를 미처 소화하지 못하더라도 그는 남김없이 구워 사직공원과 서소문 공원의 노숙자들에게 나눠 준다. 또 일이 끝난 뒤 오후에는 고아원?양로원?어린이집 등을 찾아 토스트 대접을 하며 거액의 돈도 아낌없이 내놓는다.


수년전 김석봉은 어느 세무사를 찾아가 ‘세금을 내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면허도 없는 이동성 사업이라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배고픈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 납세의 의무를 대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아무리 돈가치가 떨어지고 수십억 수백억원이 동네 강아지 이름처럼 불리고 있다고는 하나 한해에 1억원을, 그것도 땀흘린 결과로 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1억원 벌면서 폼잡고 토스트 사먹는 연봉 수천만원짜리 넥타이 부대가 우습게 생각되지 않느냐’고 슬쩍 물어봤다.


내 어투에서 묻어나는 어줍잖은 질투심을 읽었을까. 김석봉은 “바로 그 분들 때문에 내가 있다”면서 “이웃들에게 베푸는 것도 그 분들이며 나는 전달자일 뿐”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출처: 리더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