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7
1607년 <일곱 가지 자비로운 행동>이라는 대작을 그리는 일에 착수하면서
하나의 화폭에 일곱 가지 자비의 행동을 모두 담기로 했다.
이는 종교화 역사상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캔버스 위쪽에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세상의 어둠과 서로 부둥켜 안은 천사 둘을 바라보면서 공중에 떠 있다.
여기서 정죄의 성모이면서 자비의 성모이기도
한 마리아는 구원의 젖을 상징한다.
그녀의 발 아래에서 분주하게 돌아가는 인간 세상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주어진 은혜를 자각하지 못하는 한 인간의 고통은 끝없이 계속될 뿐이다.
캔버스 왼쪽 아래에는 벌거벗은 한 남자가
슬픔에서인지 감사의 마음에서인지 손뼉을 치고 있는 가운데,
그의 동료는 잘 차려 입은 신사로부터 외투를 받아들고 뛸 듯이 기뻐하고 있다
(병자를 돌보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 자선 행위),
그는 로마 병사 신분으로 아미앵 성곽을 지나다 헐벗고 가난한 자를 보고 자비를 베푼
성 마르티누스의 본보기를 따르고 있다.
순례자들은 체격이 다부지고 온화한 인상을 주는 한 남자의 환대를 받고 있다.
아마도 여인숙 주인인 듯하다(여인숙은 집 없는 나그네들이 묵는 곳이다).
그들 뒤로 반쯤 헐벗은 거지가 당나귀 턱뼈로 물을 마시고 있다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자선 행위), 카라바조와 동시대인들은 물을 뜨는 주발과
당나귀 턱뼈로 적들을 때려눕힌 뒤 사막에서 갈증으로 고통을 겪은 삼손과 연계시켰다.
그들의 오른쪽에는 하얀 저고리와 진홍색 모자 차림의 한 남자가 시체를 떠맨
또 다른 남자에게 촛불을 쳐들고 있다
(죽은 자를 거두어 묻어주는 자선 행위),
마지막으로 젊은 여인이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면서 창살 뒤에 갇힌 늙은 남자에게 젖을 빨리고 있다
(감옥의 죄수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선 행위),
아마도 이 여인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대 로마의 키모와 페로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통해 다시 태어난 옛날 이야기 속
인물들은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지들의 얼굴과 육신과 닮아 있다.
카라바조의 무대는 인위적이거나 비유적이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다시 말해 교회가 빈민들을 정화시키기 위해 준비한 무대나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코메디아델라르테의 정형화된 무대와도 거리가 멀다.
극장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자비가 베플어지는 장소인 카라바조의 무대에는
이 얘기의 진실 여부를 판가름하는 관찰자가 포함된다.
따라서 카라바조는 국외자로서의 관찰자를 배격한다. 즉 그는 관찰자에게 배우의 역할을 맡긴다.
그는 관찰자로 하여금 관객의 입장에서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지켜보게 하기보다 사방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직접 들어가게 만든다.
그 결과 관찰자는 비참한 형제 자매들에게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카라바조는 관찰자를 행동하게 만든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동이 결여된 연민은 자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생각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
피터 브뤼겔 (Pieter Bruegel the El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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