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최후의 날 (The Last Days of Pompeii)
수많은 유적들이 있지만 대부분 왕궁 무덤 신전 등이 있지만 일상생활을 자세히 엿볼 수 있는 유적은 폼페이가 유일하지 않나 생각한다.
폼페이는 AC 1세기 인구 2만-5만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로서 로마 귀족 및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였다.
폼페이는 수도관을 이용하여 집집마다 수돗물이 공급될 정도로 바쁘고 활기에 넘쳤고 로마제국의 화려함을 잘 나타내 주는 사치스러운 도시였다.
[그 당시 광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담아 낸 모습]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서 사루누스강 어귀에 세워진 항구 도시 폼페이는 79년 여름 어느 날 베수비오산의 화산의 대폭발로 삽시간에 화산재가 시가지를 덮어버리므로 그때 생활상이 고대로 17세기동안 보전되어 있다. 초기에 발굴된 유물들은 대부분 나폴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W. marlow
Vesuvius Erupting at Night
서기 79년 8월24일 아침..
한참 여름휴가의 절정을 치닫고 있던 폼페이의 아침이 밝았다.
사람들은 가끔 연기를 뿜는 베수비오산 모습이 오히려 폼페이의 경관을 더욱 멋지게 꾸며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베수비오산은 이따금 연기를 내뿜었지만 16년 전 폭발한 뒤로는 그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정오쯤, 며칠째 계속되던 땅의 흔들림이 갑자기 거세지더니 곧 베수비오로부터 하늘을 뒤덮는 버섯구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산꼭대기가 갈라지면서 뜨거운 화산재와 용암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단 하루 만에 대도시 폼페이를 5m 두께의 화산재로 덮어버렸다.
Karl Pavlovich Bryulov
폼페이 최후의 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화산은 쉴 새 없이 터졌고, 검은 연기와 불꽃이 하늘과 온 도시를 완전히 가렸다.
4시간쯤 지나자 인구 2만 명 가운데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을힘을 다해 바닷가로 달아났다.
베수비오의 화산재는 30㎞나 떨어진 미세눔 에까지도 날아오고 있었다.
로마제국의 미세눔 해군사령관이었던 대 프리니우스는 함대에 출동 명령을 내렸다.
“모든 배는 폼페이로 가서 바닷가로 탈출한 시민들을 구하라!”
함대가 폼페이 항구에 다다르니 배 위로 화산재와 경석이 마구 쏟아졌다. 바닷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연기에 휩싸여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바닷가를 달려가고 있었다. 함대는 서둘러 카스텔라마레 해안에 배를 대고 사람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믿어지지 않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났다. 바람이 돌연 낮게 깔리며 바닷가로 들이닥쳤다. 숨을 못 쉬도록 뜨거운 불기운과 독한 가스가 순식간에 함대를 덮쳤다. 구조 작업을 지휘하던 대 프리니우스, 로마 병사들, 그리고 막 구조돼 한숨을 돌리던 폼페이 시민들은 독가스에 질식돼 모두 죽고 말았다. 소 프리니우스와 몇몇 병사만이 간신히 그 곳을 벗어나 이 기록을 남겼다.
사흘이 지나자 분화가 멈추고 눈부신 태양이 다시 떠올랐다.
그러나 폼페이시는 한 채의 건물,한 사람의 자취도 없이 모든 것이 화산재와 용암 아래 파묻히고 말았다.
폼페이와 함께 베수비오스 산기슭에 세워진 헤르쿨레늄도 똑같은 불행을 당했다. 그러나 두 도시는 서로 다르게 파괴되었다.
헤르쿨레늄에는 화산재와 비,용암이 뒤섞인 진흙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려 20m 두께로 덮여 이 도시를 영원히 잠재웠다.
폼페이는 이와 달랐다. 흙탕물 대신 잿가루와 경석들이 우박처럼 쏟아졌고,유황 연기가 그 뒤를 따라 도시를 덮침으로써 모든 생명을 질식시켰다. 폭발이 끝난 뒤에도 화산재 구름은 바람을 타고 멀리 아프리카에까지 번져 갔다. 1,700년이나 흐른 뒤,사람들은 그 옛날의 모습이 하나씩 드러날 때마다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마나 갑작스레 닥친 재앙이었던지,새끼 돼지가 오븐에 넣어지려 한 채로 발견되었고, 반쯤 구워진 빵이 발굴되기도 했다.
화산재속에 묻혔던 인간이나 동물의 시체는 오랜세월에 썩어 없어지고 화산재 안에 공동(空洞;아무 것도 없이 빈 것)으로 남아 있었다.
이 공동에 석고를 주입한 다음 화산재를 제거하니 고통의 흔적이 생생한 당시 모습의 석고가 만들어 졌다.
사람들은 너무나 불쌍한 모습으로 굳어져 있었다. 어머니들은 숨이 막히기 전에 힘껏 아기를 감싸안고 있었고,어떤 이는 금붙이를 꽉 움켜쥔
채 돌더미에 깔려 있었다. 어느 집 문턱에서는 젊은 여자 둘이 집안으로 들어가 귀중품을 꺼내려고 망설이는 몸짓으로 굳어 있었고,한 집에서는 장례식을 치르고 있었던 듯 문상객들이 빙 둘러앉은 그대로 자신들의 장례식에 참석해 있었다.
모든 집이 1,700년 전 8월 어느 날 한때의 모습을 ‘동작 그만’인 채 간직하고 있었다. 도서실에는 두루마리 종이가,작업장에는 연장이, 목욕탕에는 수세미가, 여인숙 탁자에는 손님들이 서둘러 계산한 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잿더미를 걷어낸 폼페이 중심 모습, Vesuvious를 뒤로한 전경
폼페이에는 호텔 마구간 피자집 빵집 음식점 선술집 바가 있었고 공중목욕탕 시설이 잘된 사우나 대형 원형 극장 원형 경기장, 시장 등 각종 시설들이 발굴 되였고 포장도로와 하수로 시설이 되여 있다.
평온한 도시 폼페이는 농업과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고 많은 사람이 살고 있어 인명 피해가 컸다는데 영국의 소설가 에드워드 리턴은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작품을 발표했다.
작가 에드워드 리턴은 작품을 통해 말한다.
운명은 공평하다
니디아의 한쪽 문을 닫아버린 대신에
또 다른 한쪽 문을 열어 주었으니까
그리고 이것은 비단 니디아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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