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역사에서 나폴레옹 만큼이나 유명한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왕비이자 프랑스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한 여인..
한마디로 프랑스 황실을 하루도 빠짐없이 가쉽거리를 만들어 낸 그녀는
루이 16세와는 반대로 엄청난 사치와 국민의 생활고를 무시한
적자부인(赤字夫人)’이라는 빈축을 사기도 하였으며,
1785년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은 그녀의 명성에 상처를 입혔다.
또한 그녀는 왕비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의 미남 무관 페르센을 비롯한 몇 명의 연인이 있었다.
그녀의 슈미즈 차림은 유명하다.
당대의 패션으로 될 정도로 슈미즈 차림의 초상화가 황실의 벽에 걸리자
많은 귀족들이 경악하기도 했다.
마리 앙뜨와네트 Marie Antoinette
1755 - 1793
앙투아네트는 1755년 11월 2일, 빈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토스카나 대공인 프란츠 1세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녀이자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이에서 15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자유분방하게 성장한 그녀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나 댄스, 하프 연주 등을 배웠다.
그러던 그녀는
1770년 5월 16일 16세 때 베르샤이유에서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으로 1774년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결혼무렵의 앙뜨와네트 : 18세
그녀는 1755년 11월 2일생인데,
이 날은 포르투칼의 리스본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천명의 목숨을 잃은 날이다.
조짐이 좋지 않다^^;;
또한 프랑스로 떠나는 날 선물중에는 하나의 태피스트리가 들어있는데
혼례예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 들어있었다.
내용인 즉,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에게 배신당한 메데이아가 복수를 위해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을 죽여 버리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괴테는 그녀의 앞날의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끼고 경악했다고 한다.
또한 베이샤이유에서 결혼식 서명에 잉크가 번지는 실수는
다가올 운명에 대한 미래의 조짐이라고 볼 수 있다.
으스스 하네^^
Vigée-Le Brun Elisabeth Louise
Marie-Antoinette of Austria, Queen of France.
1783, Oil on canvas; 113 cm x 87 cm.
한창 꽃다운 나이에 정략결혼을 한 그녀의 궁중생활은 과연 행복했을까..?
부부 사이는 취미나 기질 등의 불일치나 루이 16세의 성불구
(나중에 치료를 받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된다) 등의 문제로 결혼한 후 7년 동안이나 자녀가 없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비가 후세가
없을때는 (남편탓이든 간에) 돌아오는 것은 외도 아니면 사치다.
그녀는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사치에 몰두했다는 설이 있으며,
밤마다
베르사유 정원 한 구석에 있는 프티 프리아농에서 호화 파티나 가면무도회를 자주 열었으며,
그 파티를 통하여 그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그녀의 몸을 치장하는 의상, 장신구, 보석 등에 소요되는 비용은 엄청났다.
루이 16세
Marie Antoinette and Louis XVI in the Garden of the Tuileries with Madame Lambale
Oil on canvas, 1857. 89.5 x 117.5 cm
Private collection
당시 절대 왕정의 위기의 중대한 원인이었던 재정의 궁핍을 고려하지 않고
그녀는 호사스럽고도 무절제한 생활을 하며 허영과 무분별 등으로
세간에 좋지 못한 평판을 남겨 왕실의 권위를 크게 실추시켰으며 민심까지 잃었다.
그래서 모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종종 서신을 보내
그녀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으나.., 효과는 없었다.
1774년, 루이 15세가 병으로 서거함으로써
남편이 루이 16세로 즉위한 후
1785년에는 부르봉 왕가의 치세 말기를 상징하는 스캔들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사건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이
발생하여 그녀에 대한 민중의 불신은 한층 더 가중시켰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사건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
또는 목걸이사건(Affair of the Necklace)이라고도 하며
혁명 직전인 1785년, 궁정에서 일어나 프랑스 왕정의 위신을 떨어뜨린 추문사건이다.
이 사건은 라 모트 백작부인이 160만 리브르나 되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입수하려 한 음모가 발단이 되었다.
겉으로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선사하기 위한 것처럼 꾸몄으나 실제로는...
이 목걸이는 파리의 보석상인 뵈머와 바상주의 것이었다.
라 모트 백작부인의 사기행각은 이렇다.
라 모트는 당시 권력에서 밀려나 언저리에 있던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왕비가 이 목걸이를 갖고 싶어하니 그가 보석상들과 이야기해서
목걸이를 얻도록 해준다면 왕실의 총애를 다시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라고 꼬드기자
귀가 솔깃한 추기경은 왕비가 쓴 것처럼 꾸며진 편지를 읽고
자신의 신용을 담보로 하여 목걸이 대금을 분납하기로 보석상들과 계약했다.
30세무렵의 마리 앙뜨와네트
그러나 이 사기행위는 로앙 추기경이 첫번째 할부금을 완전히 납부하지 못하자
보석상들이 직접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대금지불을 요구함에 따라 들통이 났다.
사건이 발각되면서 그가 왕비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목걸이가
조각조각 잘라져 런던에서 팔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루이 16세는 이 사건을 그냥 덮어두지 않고
로앙 추기경을 체포해 바스티유 감옥에 가두었으며,
라 모트 백작부인은 매질을 당하고 낙인이 찍히는 형벌을 받은 뒤
종신형을 선고받아 파리에 있는 살페트리에르 감옥에 갇혔다가 영국으로 도망쳤는데,
이 여자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지 못하고
그곳에서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는 내용의
<회고록, Mémoires>을 펴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Joseph Caraud (1821-1905)
La Reine marie-Antoinette Et Sa Fille, Madame Royale, A Versailles, 1870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으나
이 추잡한 사건으로 당시 사람들은 그녀가 도덕성이 부족하고 경박하다는 확신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이 사건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해체와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여러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혁명은 그녀의 일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왕과 그 일족은 1789년 10월 6일 파리의 왕궁으로 연행되어
1792년 8월 10일까지 시민의 감시 아래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Marie Antoinette on the way to the Guillotine
그 사이 그녀는 루이 16세를 격려하기도 하고
왕가의 안녕을 위해 미라보 매수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1792년 8월 10일의 시민봉기로 그녀는 탕플탑(塔)에 유폐되고,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단두대로 보내졌다.
Edward Matthew Ward (1816-1879)
Marie Antoinette Listing To The Act of Accusation, The Day Before Her Trial
처형전 날 자신의 죄명을 듣고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
그녀 역시 국고를 낭비한 죄와 오스트리아와 공모하여 반혁명을 시도하였다는 죄명으로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콩세르쥬리 감옥에서 나올 때 그녀는 머리카락이 짧게 깎여져 있었으며 두 손은 뒤로 묶여져 있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앙투아네트
단두대에 오르기 전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사형 집행인의 발을 실수로 밟아버렸을 때에 내뱉은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었어요.” 했다는 설이 있다...
앙뜨와네트의 시체는 처형후 아무곳에나 버려져 찾을 수 없었다.
이에 루이 18세의 명령으로 찾아낸 것은 다 썩어가는 스타킹 대님 한 조각 뿐이었다...
마리 앙투와네트와 마리 테레즈(딸), 루이 샤를(루이 17세)
강제로 폭식을 시키다가 갑자기 먹을 걸 주지 않거나 맞고, 구박당하는 건 예사였다.
시몬은 여느 날처럼 루이를 구타했다.
그의 주먹에 맥을 못추는 루이를 보고, 시몬이 비웃으며 물었다.
"Que me feriez-vous si vous etiez le roi?"
"네가 왕이었다면 날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루이 샤를은
"Je vous pardonnerais."
당신을 용서하겠어요.
루이 17세는 다시 탕플 감옥에 갇혔으며(1794. 1),
가혹한 수감생활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결국 감옥에서 숨졌다.
사인은 임파선 결핵으로 발표되었다.
루이 17세가 죽기 전 몇 달 간의 상황은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에
그의 사후 갖가지 소문이 떠돌았다.
어떤 사람은 그가 죽지 않고 탕플에서 탈출했다고 주장했으며,
독살되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그가 죽고 난 다음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루이 17세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30명이나 나타났다.
'그림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폼페이 최후의 날 (0) | 2008.09.19 |
---|---|
밀레 - '만종'의 바구니 (0) | 2008.09.19 |
구스타프 모로 Moreau.. 상징주의 화가 (0) | 2008.09.19 |
모딜리아니 - 영혼의 사랑, 쟌느 에퓨테른느 (0) | 2008.09.18 |
헤르메스 (메르쿠리우스y) ..전령의 신 (0) | 2008.09.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