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행

미인계, 거짓된 사랑의 비극

강병현 2008. 9. 25. 03:14

 

영화 <파리넬리>에서 '울게 하소서'라는 아리아가 나오는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

여자마법사 아르미다는 십자군의 영웅 리날도를 해치려 했으나 오히려 그에게 반하게 되고,

그를 유혹하려 하지만 리날도는 사랑하는 연인 알미레나를 그리워하며

유명한 아리아 '나의 임이여 (cara sposa)'  노래를 부르며 유혹을 뿌리친다.

  

HAYEZ Francesco - Rinaldo and Armida


나라간, 또는 종교전쟁 당시 상대의 사랑을 이용하는 전쟁의 희생물인 연인에 관한

이 로맨틱한 연애담은 십자군전쟁에서 기인한다.

십자군의 용맹스러운 장군 '르노'는

팔레스타인 항구 도시인 ‘아스칼론’을 함락시키기 위해 배를 타고 출정했다.

이 항구는 그동안 십자군 전쟁의 격전지였다.

아랍인들에게 정복당한 이 지역은 이스라엘로 가는 길목이었으므로

십자군은 이 항구를 반드시 점령해야만 했다.


그런데 항구를 바라보는 평야에 포진한 십자군 기사들에게

어느 날 이상한 기사가 한 명 찾아온다.

이 기사는 아스칼론의 무녀 '아르미드'였다.

그녀는 아스칼론의 성주 히드라오트 왕의 딸로

마법사 이스멘의 계략을 실행에 옮기고자

남자로 위장해 용감하게 적진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다마스 성이 함락되어 협조를 구하러 왔다고 속여

십자군 기사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할 심산이었다.

아르미드는 왕 앞으로 안내되었는데

그때 그녀를 만난 적이 있는 기사 르노와 눈이 마주쳤다.

남장을 한 여인임을 눈치 챈 르노는 이 용감한 여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아르미드 또한 르노에게 특별한 감정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Tiepolo  

Rinaldo and Armida in the Garden



그러던 중 마법사 이스멘이 나타난 아르미드와 함께 르노 장군을 납치해

아스칼론에 있는 마법의 숲으로 데려간다.

그는 성 안으로 조심스럽게 혼자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숲을 지나 비밀의 정원에 이르자

르노는 문득 누군가를 발견하게 되는데,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

가슴을 풀어헤친 채 혼자 정원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미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Lagrenee Louis

 Rinaldo and Armida



아르미드는 사실 처음부터 성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르노를 함정에 빠뜨릴 전술을 세웠다.


미인계를 쓰기로 한 아르미드는 대담하게도 성을 비우게 한 뒤

홀로 남아 앞가슴을 풀어헤친 채로 기사 르노를 기다렸다.


이 계략은 멋지게 성공했고

전쟁에 지쳐 있던 르노는 그녀가 던지는 육감적인 매력에 걸려들고 말았다.

르노는 비밀의 정원을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전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다. 


르노가 사라진 후 십자군의 군사들은 서둘러 아스칼론으로 향했다.

마침내 비밀의 정원까지 들어온 군사들은

그 안에서 르노와 아르미드가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목격한다.

자신의 군사들이 와 있는 것도 모른 채 르노는 아르미드와 격렬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무장을 벗어던진 르노는 아르미드와의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듯했다.

정원 한구석에 마련된 침대에서 꿈같은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르노의 참모들은 정원 안을 기웃거리며 그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Nicolas Poussin 

Rinaldo and Armida


르노의 사랑이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

아르미드 역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르노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그리고 갈등 속에 괴로워한 나머지 마침내 모든 사실을 고백하고 만다.


사랑의 꿈에서 갑작스레 깨어난 르노는 분개하여

아르미드를 떠나고 군사들을 데려와

성과 비밀의 정원을 순식간에 폐허로 만들었다.

성은 함락되었지만 아르미드는 비밀의 정원을 떠나지 않았고,

르노를 향한 사랑에 가슴 아파하던

그녀는 무너진 궁전에서 폐허 더미에 깔려 목숨을 잃는다.

 

 

 

Francois Boucher  

Rinaldo and Armida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르네상스 말기의 화가 티에폴로를 위시한 여러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1734년에 프랑수아 부셰가 그린 '르노와 아르미드'는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사랑스런 아르미드의 모습에서 헤어날 수 없는

연정을 느낀 르노가 무장한 채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 같은 이 그림은 실제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이

오페라로 작곡해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다.

로시니와 드보르작도 이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주제로 오페라를 작곡했다.

 

 

 

Rinaldo and Armida



한 사람은 아무 것도 모른 채 마음을 주고 다른 사람은 그 마음을 이용하려 든다..

어느 쪽이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하지 않은 사랑은 언젠가는 파멸로 치닫게 마련이다.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랑을 이용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고 그의 삶은 폐허 속에서 끝날 수밖에 없다.

사랑은 전술이나 계산이 아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 했던 거짓말은 끝내 용서받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