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행

마녀사냥 The witch-hunting & Trial

강병현 2009. 1. 31. 14:21

 

"인간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행할 때일수록

기쁨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

 

파스칼 [팡세] -

 

"Arresting a Witch."
Howard Pyle.
Harpers New Monthly Magazine, Vol. 67, (June - November), 1883

 

"Witch Hill," or "The Salem Martyr"
Oil painting by New York artist Thomas Slatterwhite Noble,

1869.

 

 

"Examination of a Witch"
Thompkins H. Matteson,
1853

 

The Bonfire 2

 

서양에서 마녀사냥이 공식화 된 것은 이노센트 8세라는 카톨릭 교황이 인준하기 시작해서 부터이다.

교회는 중세이후 사회적 위기를 마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여 책임을 전가하게 된다.

고통당하고 소외되어 힘들어진 대중은 교회와 귀족을 저주하는 대신

자신의 불행을 마녀의 영향으로 치부하며 저주를 퍼 붇는다.

교회나 국가는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찾게 되었고

이는 체제와 교회를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가 된다.

 

중세시대는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였던 암흑의 시대로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야기된 교권의 실추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이단적 신앙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 것이고, 온갖 질병(흑사병),

기아와 악화되는 경제상황(유럽의 농민경제 파탄), 종교전쟁 등 내부 분열,

외부 이교도들의 침입 등으로 혼란했던 시대상황에서도

로마 교황청은 베드로성당을 증축하기 위하여 성직자들을 통하여 면죄부를 파는 등

민중에 대한 수탈, 부패와 타락을 보였고 이를 반박하는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간파되자

절대적 권좌에 있던 가톨릭교회는 마녀라는 희생양을 내세워

그들을 무마하고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마녀사냥을 감행하기 시작한다. 

 

역사상 특이한 현상들이 많이 존재하지만 ‘마녀사냥’만큼 이해하기 힘든 일도 드물 것인데,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상(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등등)을 철석같이 믿고

당시의 권세가들은 종교재판소를 설치하여 마녀들을 소탕하는 운동을 벌렸는데,

개략적으로 15세기 말부터 수백 년 동안이나 유럽에서 마녀로 판정받고

처형당한 사람이 약 10만 (900만에 이른다는 설도 있음) 명에 달하였으며,

오히려 중세보다는 근대 초인 1590년대부터 1660년대에 극성기를 이루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의 유럽은 합리주의와 휴머니즘시대의 절정기라는 사실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교황, 고위 성직자, 국왕, 귀족, 학자, 재판관 등

당시 사회 지도적 자리에 위치하여 권력의 최고봉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핍박받고 있는 민중 (주로 여성, 빈민, 과부, 노인 등)에

대한 잔악한 폭력이었다는 것다.

 이러한 광란의 질주는 18세기 후반에 절정을 이룬 계몽주의 정신의 대두로 차츰 소멸하게 된다.

 

마녀의 집회

 

 

누가 마녀인가?? 

 

마녀는 한 마디로 돈없고 빽없는 이쁜 여자와 과부가 그 주 대상이 되었다.

 마녀의 대상이 대부분 여성이었던 이유에 대하여는

오랜 세월에 걸친 기독교의 여성혐오전통과 여성은 마치 불안한 정서를 가지며,

부정한 존재라고 오인하였던 것과 신학자들은 종교의 관점에서

여성은 도덕적으로 확고하지 않는 존재로 신앙이 부족하여

악마의 유혹에 쉽게 빠지므로 마녀가 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그래서 이브는 뱀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당시 마녀의 대부분은 여성(러시아에서는 희생자의 약 30%가 남성)이었는데,

그들의 신분은 거의 사회적 약자, 소수자, 가난뱅이 및 정신병자로서

시각을 바꾸어 보면 희생자들 중 다수는 오히려 민간요법에 해박한 늙은 과부,

지나치게 똑똑하여 당시 사회에 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진 여성이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로 민간요법이란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요술내지는 마법으로 보았을 것이며,

당시 가톨릭은 성서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구황식품인 감자를 못 먹게 하였다는 사실로 볼 때

그들의 시각은 상당히 편협적이고도 위선적이었다.

 

마녀은 어떻게 구별하는가??.

 

 마녀 용의자로 고발되거나, 또는 위증한 자나 혹은 세상의 소문으로 낙인이 찍히면

바로 소추, 체포하고 구금한 뒤 갖은 고문을 통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 마녀로 확정

 (그의 가족, 자백으로 알아낸 마녀집회의 다른 참가자 포함)한 뒤 처형하였다.

 마녀에 대한 식별법은 우선 마녀는 하늘을 날 만큼 몸이 가볍기 때문에

저울로 몸무게를 측정하여 정상인보다 가벼우면 마녀로 판정하였다

(성서보다 가벼우면 마녀로 판정되기도 했다는 구절도 있네요^^).

쟌 다르크가 마녀가 된 이유도 여기에 속하죠.

 

 또한 마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리고 신체에서 사마귀, 반점, 부스럼, 혹, 기미와 주근깨 등도 마녀의 후보가 된다. 

또한 바늘이나 칼로 신체를 찌르는 방법

(마법이 있는 마녀는 아프지도 피도 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을 동원하였다.

일부 재판에서는 피의자의 옷을 모두 벗긴 채 수백 군데를 찔렀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출혈하지 않는 부위를 찾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1660년대 스코틀랜드에서 활동한 마녀사냥꾼인 존 킨케이드는

 칼날이 쑥 들어가는 칼을 만들었다.

그가 갖고 다니던 이 칼로 찌르면 절대로 피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신명심판"

먼저 사흘간 금식을 하고 그 다음에는 마녀라고 추정되는 여자의 유죄여부를알려달라고

신에게 요청한다. 그런 다음에 고발당한 여자의 손에

새빨갛게 달구어진 쇠를 쥐어주고쇠와 손을 함께 천으로 둘러싼다.

사흘 뒤에 붕대를 풀었을 때 화상을 전혀 입지 않았다면 그녀는 무죄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아예 그 여자를 통째로 불태워버렸다.

물이 펄펄 끓는 작은 솥 안에 고발된 여자의 팔을 집어넣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수장심판"

마녀는 몸무게가 가볍기 때문에 손발을 끈으로 묶어서 강물 속에 집어넣는다고 해서

 곧장 물 속으로 가라앉지는 않는다.

만일 물위에 떠오르면 악마와 교접한 근거가 되어 처형하였고,

빠져 죽으면 결백하지만 결국 억울한 죽음으로써만

자신의 누명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The Confessor

 

 실상 없는 사실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작업인 식별법으로

마녀를 판별해야 하는 당시 재판관들은 무척 고민하였을 것인데,

그 때 교황사절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죽여라.

신이 분별해 주실 것이니까.’라고 말했다 한다.

 

 

마녀를 어떻게 고문했나??

 

1484년 교황 이노센트 8세의 교서는 '온갖 방법을 다하여' 마녀를 처벌하라고 명시하고 있다.

바로 고문을 인정하고 권하는 대목인 것이다.

 고문의 방법은 우선 고문실로 끌고 가 나체를 만든 뒤 채찍질, 손가락조이기,

매달아 올리기와 떨어뜨리기, 뼈 부수기, 많은 양의 물을 한 번에 마시기, 손톱 밑을 바늘로 찌르기,

 다리 비틀기, 발바닥 태우기 등 온갖 잔혹한 고문을 하여

억지 자백을 받아낸 뒤 마녀집회에 참가한 공범을 색출(?)하고,

그들의 자녀마저도 처형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실제로 한 강철과 같은 한 여인이 있어 56회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아 석방되었다는 사실이다.

 

 

독방에 가둬놓고 거미나 쥐가 피의자의 방향으로 달려가면 마녀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모든 마녀 감별법은 1486년에 출판된 <마녀 소추 지침>이라는 책 속에 소개돼 있다.

여기에는 마녀를 고문하는 방법도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고문도구를 보여주거나 옆방에서 고문받는 사람의 비명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우선 겁을 준다.

그러다 고문이 시작되면 점차 강도를 높여간다.

 

Interrogating Painting
 
고문의 방법이 너무나도 잔혹하고 여러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마녀의 징표라고 했기 때문에
한번 의심을 사서 잡히게 되면 어떻게 되든 마녀가 돼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행위를 한 종교재판소는 1231년 카타르파, 알드파 등 가톨릭에 대한 이단집단이 등장하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1252년 인노켄티우스 4세 때 고문에 대하여 승인되었는데,
알량한 자비심 때문이었는지 처음에는 세속재판소에 의뢰하여 처형을 행하다가
결국은 종교재판소도 동일한 범죄의 온상이 되었다. 
 심지어 마녀를 처형한 뒤 그들에게 처형 비용을 부과하였고, 그
 금액의 혼란으로 인하여 1757년 독일 쾰른 대주교는 형리의 부당한 요금청구에 시달리게 되자
‘공정 처형 요금표’를 만들었던 웃지도 못할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The Bonfire 1
 

마녀 사냥은 구 질서의 대표적 지도층인 교황과 성직자, 봉건 영주, 귀족,

왕의 부추김에 의해 전 유럽에 퍼져 나갔다.

이들은 당면한 사회적 혼란상을 일반인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했고,

천 년동안 지켜져온 사회질서를 보존해야 했으므로,

전통의 가치관과 다른 생각을 품은 사람은 모두 '이단아'요 '마녀'라고 선언했다
 

이단 판결을 받은 사람 중에는 오늘날 근대과확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적지 않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한 갈릴레이,

그도 이단으로 몰려 재판을 받고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다.

그런가 하면 지동설을 지지한 조르다노 브루노는 자신의 주장을 바꾸지 않은

까닭에 이단 판결을 받고 화형 당했다.
 

르네상스를 즈음하여 마녀 사냥이 주로 대도시 주변의 시골이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은 여전히 전통적인 경제구조와

가치관이 사람들 생황의 중심을 이루는 반면,

도시는 재래의 것과 새것의 갈등이 가장 활발하고 첨예하게 나타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쟌다르크Jeanne d'Arc, 프랑스의 수호성녀

 

잔다르크는 마녀?

 

마녀로 처형된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 잔 다르크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1339년부터 1453년까지 벌인 이른바 백년 전쟁에서

시종 불리했던 프랑스를 구한 애국 소녀 잔 다르크가 영국군의 포로가 되자,

영국 세력하에 있던 파리 대학 신학부는 그를 '마녀'라는 죄목으로 재판에 부했다.

여자인 잔 다르크가 남장을 하고 전투의 선봉에 선 사실이 바로 마녀라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결국 화형당해 그녀의 뼈는 센강에 뿌려졌다.

 

1920년 5월 16일 가톨릭교회가 잔 다르크(1412∼1431)를 시성(諡聖)했다.  

464년 만이었다.

뛰어난 인문학자였던 토머스 모어의 시성도 400여 년이 걸릴 만큼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르기란 오랜 시간과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일이었다.

 

 
무너지는 중세를 지키기 위한 대리 희생물
 

마녀 사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귀족과 교회에 의지하게 만들었다.  

흉년, 굶주림, 질병, 아이들의 죽음, 서민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마녀의 소행이며, 못된 마녀를 잡기 위해 애쓰는 교회와 국가는

성스럽고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생각되었다.

바로 여기에 마녀 사냥의 감춰진 비밀이 있다.
 

마녀는 무너지는 중세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봉건 귀족과 성직자들이 찾아낸 대리 희생물이었던 것이다.

마녀는 사회적 혼란의 책임을 돌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 종교적 작품이다.

지방관리와 성직자들을 마녀 사냥에 적극 끌어들이기 위해

관리에게는 마녀로 기소된 사람의 전 재산을 몰수할 권리를 주었으며,

마녀로 기소된 사람의 가족은 재판관들의 연회비용과 화형용 나무값을 모조리 내게 했다. 

 

 

 

한편 마녀 사냥에는 중세의 뿌리깊은 성차별 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다.

1562년부터 1684년까지 독일 남서부에서 일어난 1,258건의 마녀 처형

사건 중 82%가 여자였다는 사실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했다.

마녀로 지목된 여자들은 대개 눈에 잘 띄는 남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너무 못생겼거나  예쁘거나, 성품이 못되었거나 신체적 결함이 있거나,

병을 잘 고친다든지 하는 남다른 재주가 있거나,

혹은 남편 없이 혼자 사는 과부거나,

어떤 의미로든 사회적 일탈자였고, 가난한 하층계급의 여성이었다

 

Ricardo Falero - Vision de Faust

 

마을에 전염병이 돈다든지 흉년이 든다든지 뭔가 좋지 않은 일어나면

누군가 '마녀가 우리 마을을 해치려 한다'고 소문을 내고,

그러면 마을 전체는 마녀사냥 열풍에 휩쓸리는데

그때만다 주로 혼자 사는 과부, 가난한 중년 여인이 희생물이 되었다.

과부의 경우, 남편이라는 사회적 보호막이 없기에 희생물로 삼기 쉽고,

과부 = 사회적 일탈자라는 의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역사적으로 권력을 소유하여 소위 지배계급에 있는 사람들이란,

그들의 기득권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으로 발생하는 부패라는 악취에 대하여,

자기성찰과 겸허한 반성을 통한 각고와 살을 깎는 개선보다는

오히려 그 악취를 맡고 있는 민중에 대하여 더욱 강한 핍박을 한다던지,

아니면 민중의 시각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우민정책 편다던지

또는 여러 가지 어불성설의 이유를 들어 아무런 관계도 없는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 등으로 위기를 극복하려하는

권력에로의 집착하여 결국은 패망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Bessonov Nicolay.
Witch-hunting at Scothland.
Drawing.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