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여행

[스크랩] [한옥]한옥의 구조

강병현 2012. 9. 6. 03:01

한옥구조개요

한옥과 현대주택
한옥과 현대주택
재료측면의 한옥구성
재료측면의 한옥구성
한옥을 짓는데 사용된 주재료는 특별한 건축이 아니면 인근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나무와 흙과 돌이었다. 나무는 한옥에 있어 기본 뼈대가 되는 가구(架構)의 주재료다. 나무는 크기의 한계가 있고 불타기 쉽고 썩기 쉬워 집을 짓는데 좋은 재료는 아니다. 즉 취약하기 이를데 없는 재료인데 우리 선조들은 이를 가지고 아름다운 형태의 한옥과 감동적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흙은 손쉽게 우리가 사는 어느곳이든지 바로 구할 수 있는 재료다. 가공이 쉽고 습기조절 등 거주환경에 매우 유익한 재료다. 주로 벽과 마당, 그리고 기와를 잇는데 사용됐다. 이 흙이 바로 황토(黃土)다. 황토는 최근에 건강재료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한옥짓기외에 미용과 양식 등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그리 넉넉하지 못한 삶에서도 건강을 유지했던 것은 바로 황토 덕이 아닌가 한다.
재료와 구성방식으로 본 건축의 구조
  • 가구식 구조 : 가늘고 긴 부재(나무, 철재)를 서로 맞추어 만든 구조
  • 가구식구조
  • 조적식 구조 : 벽돌, 돌 등의 개개의 재료를 교착재(시멘트몰탈, 석회 등)를 써서 구성한 구조
  • 일체식 구조 : 건물의 주 구조체(기둥과 보 등)를 일체로 만든 구조. 거푸집을 사용하며, 규모가 크지 않은 현대건축의 대부분이 이 구조방식을 사용한다.
한옥의 구조적 미
한옥은 구조나 수장재로 쓰인 나무가 집 밖은 물론 안에서까지 형태 및 질감이 그대로 노출된다. 예를 들어 한옥의 가장 권위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인 대청을 보면 좀 지나칠 정도로 큰 대들보가 대청마루 위에 걸려있다. 자연스럽게 휜히 보는 하얀 회벽에 반쯤 가려진 서까래와 함께 아름다운 구조미(構造美)를 연출한다. 이러한 구조미는 대청 바닥의 덜 정교하게 짜여진 마루널과 연결된다.

  • 지붕 용마루
  • 두사람이 새끼줄을 팽팽하게 잡고 있다가 약간 늘어트린 모양의 지붕 용마루 선은 직선이 대부부인 중국과 일본의 지붕모양과 크게 차이가 나고 있음
  • 지붕 용마루
  • 기둥과 안방의 세로와 가로선들도 비록 직선이지만 서로 대칭이 아닌 상태에서 서로 크기를 달리하면서 아름다운 입면(立面)을 보여주고 있음
  • 지붕 용마루
  • 창호지를 안쪽에서 바르므로 문살의 구성이 바깥에서 그대로 드러나 다양한 선의 미가 드러나고 있음
한옥의골격(뼈대)
  • 한옥의 골격
  • 한옥의 구성방식은 목조가구식이다. 즉 나무로 기본골격을 만든 후 지붕을 씌우고 벽체와 창호 등이 설치된다. 따라서 기본골격이 되는 목구조의 원리를 살펴보는 것은 한옥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기본골격의 중심이 되는 부재는 기둥, 보, 도리이다. 부재의 크기는 보통 집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기둥 상부로는 집의 평면과 규모에 따라 결구방식이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이 부분의 목재 엮기 방식을 가구(架構)라고 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한옥구조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이는 현대건축의 철근콘크리트조에서 지붕구조가 구조적으로 특수한 건물이 아니면 크게 드러나지 않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
    한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가구형식은 3량가(三樑架)와 5량가(五樑架)가 있다. 가구 숫자는 단면상의 도리(道里)수로 결정한다.
한옥의 주요부재
  • 기둥 : 기둥은 구조적으로 상부의 하중을 받아 지면에 전달하는 중요한 부재이다. 원주(圓柱)와 방주(方柱)가 있다. 도리기둥이라고도 부르는 원주는 본래 살림집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왔는데 조선후기로 갈수록 잘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 원형기둥은 입면형식에 따라 원통형기둥, 배흘림기둥, 민흘림기둥으로 분류되는데 한옥에서는 하부부터 상부까지 거의 같은 크기의 원통형기둥이 주로 사용되었다. 배흘림기둥은 기둥 중간에서 약간 아래쪽부분을 제일 굵게 하고 위로 길수록 얇게 한 기둥인데 이러한 기둥을 시각적으로 안정되게 보인다. 한옥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규모가 큰 정전 등에서 주로 보인다. 강릉 객사문, 부석사 무량수전, 수덕사 대웅전 등에서 아주 우수한 배흘림 기둥을 볼 수 있다. 민흘림 기둥은 아래에서 위로 길수록 얇아지는 기둥이다.
  • : 앞뒤 기둥의 상부에 걸리는 수평부재로 목조건축에서 제일 굵기가 큰(단면상) 부재이다. 보는 천장을 하지 않는 대청에서 제일 잘 보인다. 보는 가구형식에 따라 대들보(大樑), 중종보(中宗樑), 종보(宗樑), 퇴보(退樑), 우미량, 맞보 등 여러 종류가 있는데 보통 규모의 한옥에서는 주로 대들보와 종보, 그리고 퇴보 정도만 사용되었다. 보의 단면 형식은 폭보다는 높이가 높은 방형의 보가 주로 쓰였고 직선 보다는 자연스럽게 휜 부재를 많이 썼다.
    퇴보 대들보

  • : 가구의 최상부에 횡으로 걸리는 부재로 서까래가 바로 이 위에 놓인다. 도리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주심도리(기둥위에 놓인 도리), 종도리(제일 높은곳인 용마루 부분에 놓인 도리), 중도리 등으로 구분된다. 또한 단면형식에 따라 굴도리(원형)와 납도리(방형)로 구분되는데 납도리는 서민의 살림집에서 주로 썼고 굴도리는 양반집의 사랑채 등 일부에서만 사용됐다.
가구형식
  • 3량가 : 3량가는 가구구조중 제일 간결한 가구기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 즉 행랑채와 문간채, 퇴가 없는 민가 등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가구구조이다. 이 구조는 도리가 3개 걸리는데 대들보 중간에 놓이는 대공 위의 높은 곳 하나와 앞뒤 기둥 위에 낮은 곳 2곳이다. 높은 곳 도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서까래를 걸어 지붕 물매를 결정한다.
    3량가구 3량가구

  • 4량가 : 4량가는 3량가 형식에 건물 앞쪽으로 약간 높이가 낮은 기둥이 하나 더 세워지고 그 위로 도리가 걸리는 형식이다. 대개 민가 등에서 많이 보이는데 앞쪽의 기둥을 퇴기둥이라 하고 안쪽의 벽체 사이에는 마루(툇마루)가 놓여진다.
    4량가
  • 5량가 : 모두 5개의 도리가 걸리는 5량가는 다음과 같은 3가지 타입이 있다.
  • 2평주 5량가
  • 2평주 5량가는 한옥뿐만 아니라 사찰의 불전이나 향교의 대성전, 서원의 강당 등 전통건축에서 보편적으로 제일 많이 쓰이는 형식이다. 같은 높이의 앞뒤 기둥위에 대들보(큰보)를 걸고 보 양쪽에 동자주를 세워 다시 종보(작은보)를 걸고 그 중앙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거는 형식이다. 이 형식은 넓은 공간이 필요로 하는 한옥의 대청 등에서 많이 사용된다.
    2평주 5량가 2평주 5량가

  • 1평주 5량가
  • 이 형식은 전면으로 퇴간(툇마루)을 두는 남부지방의 한옥에서 주로 많이 사용되는 형식이다. 즉 전면 기둥(퇴주)과 반칸정도(3∼4자 정도) 사이를 두고 안쪽으로 높은 기둥(고주) 하나를 세우고 이 기둥의 상단부 쯤과 후면기둥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다시 고주 위에서 대들보에 놓인 대공위로 종보를 하나 더 거는 형식이다.
    1고주 5량가 1고주 5량가


 

  • 2고주 5량가
  • 이 형식은 전·후쪽의 평주(퇴주) 안쪽으로 반칸 정도 거리를 두고 이보다 다소 높은 기둥을 2개 세우고 이 기둥위로 대들보 하나만 거는 구조이다. 규모는 작으나 전후로 퇴간을 두는 민가에서도 이러한 형식은 볼 수 있다.
2고주 5량가


※ 민도리집과 소로수장집
한옥을 구분할 때 민도리집, 납도리집, 굴도리집, 소로수장집 등의 명칭이 흔히 쓰인다. 민도리집이란 이는 기둥상부에 바로 보를 올려 놓는 집으로 구조적으로 제일 간단한 집이다. 이 경우 납도리를 쓰면 ‘납도리집’이라고 하고 굴도리를 쓰면 ‘굴도리집’이 된다. 도리 아래로는 보강재로 네모난 단면의 장혀를 사용한 집도 있다. 한편 기둥상부에 횡으로 창방을 걸고 이와 장혀사이에 ‘소로’라는 부재를 일정 간격으로 끼워 넣은 집도 있는데 이런집을 ‘소로수장집’이라고 부른다. 소로수장집은 민도리집보다 장식적이고 우월하게 보인다.
1고주 5량가 1고주 5량가
한옥의골격(뼈대)
기단
집을 지을 때 지면(마당)으로부터 일정한 높이의 단(壇)을 만들고 그 위에서부터 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이때 만들어진 단이 바로 기단이다. 단을 만드는 목적은 지면으로부터의 1차적으로 습기가 올라오는 것을 막는데 있는데 특히 비가 올 때 낙수물이 기단 밖으로 떨어지게 되어있어 집을 보호하는데 매우 좋다. 사대부가옥에서는 위엄을 내세우기위해 일부러 기단 높이를 높게하기도 했다. 한옥에 사용된 기단의 종류에는 크게 토축기단과 석축기단이 있다.
  • 토축기단 : 서민들이 살던 민가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흙으로만 쌓기도 하고 일부 돌을 섞어 사용하기도 했다.
  • 석축기단 : 자연석을 사용한 자연석기단(막돌기단)이 있고 돌을 가로로 길게 다듬어 사용한 장대석 기단이 있다. 장대석 기단은 주로 반가에서 많이 보이는데 대개 1단(외벌대) 내지 2단(두벌대)으로 되어있다.
    자연석기단 장대석기단
초석
  • 기둥 밑에 놓여지는 돌을 말한다. 흔히 주춧돌이라고도 한다. 초석의 역할은 상부의 모든 하중을 기둥과 함께 효율적으로 지면에 전달해 준다. 초석의 종류에는 자연석 초석과 가공석 초석이 있다.
  • 자연석 초석 : 막돌초석, 또는 덤벙주초라고도 하며 둥글고 넓적한 자연석을 말한다. 이 초석은 상부면이 고르지 않기 때문에 기둥 밑면을 돌에 맞추어 깎아낸다. 이러한 작업을 ‘그랭이질’이라고 한다.
    막돌초석 그랭이질
  • 가공초석 : 이 초석은 형식에 따라 원형초석과 방형초석이 있다. 한편 근대화 이후에는 한옥에서 사다리형 초석도 보이며 사랑채의 누마루 아래 등에는 높이가 매우 높은 방형장초석(方形長礎石)도 사용하였다.
    원형초석 방형초석
벽체
한옥에서 벽체는 주로 기둥사이에 만들어져 실 내외를 구분하고 내부 칸막이 역할도 한다. 벽체의 주 재료는 흙이기 때문에 넓은 벽면을 모두 흙으로 채우기는 구조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기둥사이에 인방같은 수평부재를 걸고 벽체를 만듭니다.
벽체
  • 인방 : 이웃한 기둥과 기둥사이를 가로 지르는 수평부재다. 보통 한옥에서 상·중·하로 세 개가 걸리는데 그 위치에 따라 상인방, 중인방, 하인방으로 구분된다. 보통 상 하인방사이에 문이 설치된다.
  • 벽선 : 벽선은 기둥 바로 옆에 대는 수직부재다. 즉 기둥과 벽체(흙벽)와의 완충역활을 해준다.
  • 심벽 : 한옥뿐만 아니라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가장 널리 보이는 벽체구성방식이다. 심벽은 인방사이에 중깃(1∼1.5치 정도의 가는목재)을 세우고 다시 수평으로 가시새가 설치된다. 여기에 다시 수수깡, 싸리나무 등으로 눌외와 설외를 대고 흙을 채운 후 면을 마감한다. 마감은 반가의 경우는 회를 발라 하얗게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회벽이라고 한다. 서민의 집에서는 그냥 흙벽 자체로 두는 경우가 많다.
  • 판벽 : 중인방 아래를 판재로 마감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판벽(板壁)이라고 한다.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헛간채, 부엌 등에 주로 쓰인다.
    판벽
  • 화방벽 : 중인방 아래로 돌 등으로 두껍게 쌓은 벽을 말한다. 내구성이 있어 화재나 습기방지에 좋다. 문간채 외벽 등에 주로 쓰인다.
    화병박
  • 죽담벽 :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벽전체를 구성하는 구조이다. 죽담벽 집의 경우는 대게 기둥이 전면에만 2~3개정도만 들어간다. 민가에서도 아주 열악한 살림집 내지는 측간채 등에서 사용된다.
    죽담벽1 죽담벽2
  • 토벽 : 흙만으로 반죽하여 쌓은 벽이다.
지붕
지붕은 한옥의 전체 구성비례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편 지붕은 크고 육중하지만 용마루나 추녀 등의 곡선과 기와의 반듯한 선 등이 있어 한옥의 아름다움이 한층 더 드러나고 있다. 한편 한옥의 깊은 처마는 그늘을 만들어 여름철의 뜨거운 태양열을 차단해준다. 비가 올 때도 창문을 열수 있게 해주고 습기가 내부로 들어오는 것도 상당부분 막아준다.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맞배지붕 합각 암키와
맞배지붕 합각 암키와
수키와 홀처마 겹처마
수키와 홀처마 겹처마
와구토 추녀 일식기와
와구토 추녀 일식기와
지붕은 사용재료에 따라 초가지붕, 기와지붕, 너와지붕 등이 있다. 기와지붕의 경우 형태에 따라 맞배지붕, 팔작지붕, 우진각지붕, 모임지붕 등이 있는데 한옥의 경우는 안채와 사랑채 등에 팔작지붕이 제일 많이 보이고 사당이나 곡간채 등에서는 맞배지붕이 많이 보인다.
기와를 얹기 위해서는 서까래 위에 개판으로 1차 마감한다. 개판위로 다시 서까래를 눌러주고 지붕 물매를 잡기 위해 잡목이나 치목후 남은 목재 등을 채워주는데 이를 적심이라고 한다. 적심위에는 단열과 지붕골을 위해 일정 두께의 흙을 깔아주는데 이를 보토라고 한다. 흙에는 방수목적으로 생석회를 섞어 강회다짐을 하기도 한다.
지붕에서 제일 돋보이는 곳은 역시 기와다. 전통기와의 구성은 크게 암키와와 수키와로 구분된다. 기와 밑에는 차진 흙은 까는데 암키와 밑에 까는 흙을 알매흙이라 하고 수키와 밑의 흙은 홍두께흙이라고 한다. 처마끝 기와는 막새기와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강회를 써 하얗게 발라준다.(와구토) 일본의 살림집에서는 암키와만 사용되고 중국의 경우는 우리기와와 달리 작은 기와가 촘촘히 놓여진다.
창호
창호는 한옥에 사용된 창과 문을 총칭하는 용어다. 창호는 개폐형식, 살대의 형식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가 있다.
  • 출입을 위한 문 : 판장문, 골판문, 불발기 등
죽살문(좌) 판장문 들어열개창
죽살문(좌) 판장문 들어열개창
  • 환기 목적용 창 : 살창, 교창 등
살창 봉창(좌) 걸창
살창 봉창(좌) 걸창
  • 살대구성등 창호모양 : 띠살, 용자살, 아자살, 정자살, 빗살, 소슬빗살, 귀갑, 숫대살
빗살 띠살문
빗살 띠살문
창 아래에는 ‘머름’이라는 높은 문지방이 설치되기도 한다. 높이는 보통 30∼40㎝ 정도인데 이 정도의 높이면 마당에서 보아도 방안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머름을 설치하면 집이 훨씬 고급스러워 보인다.
머름
머름
천장
천장은 지붕틀 하부를 막는 장치이다. 막을 경우 단열 및 소음차단 효과도 있다. 천장의 종류는 건축물의 종류에 따라 매우 다양하나 한옥의 경우는 단순하게 2가지가 있다.
  • 연등천장 : 지붕가구가 그대로 보이게 어떠한 장치도 하지 않는 천장이다. 이 경우 대들보나 서까래 같은 부재가 그대로 노출되어있어 목구조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드러난다. 보통 대청마루에서 이 방식을 채택한다. 한편 광이나 서민의 살립집 방에서도 연등천장을 쓰기도 했다.
  • 우물천장 : 천장중에는 틀을 짜고 판재를 댄 우물천장이라고 하는 고급천장도 있는데 이는 주로 사찰이나 궁궐 등에서 많이 사용되다. 종이반자는 사람이 거처하는 방을 대부분 나무로 반자틀을 짜고 종이를 발랐는데서민의 집은 무늬없는 한지를 주로 발랐으나 양반집 경우는 색과 무늬가 들어간 종이를 바르기도 했다.
연등천장(민가) 우물천장
연등천장(민가) 우물천장
마루
  • 툇마루 : 전면 툇간에 설치되는 한옥의 보편적인 마루. 마당과 방사이에 놓인 완충공간으로 쓰임새가 아주 다양함
  • 대청마루(우물마루) : 사대부 가옥에 설치되는 넓은 마루. 제사를 치르는 장소로서 의미가 컸음
  • 쪽마루 : 기둥 바깥쪽에 좁은 폭으로 설치되는 마루. 보통 건물 측면에 부분적으로 설치
우물마루(툇간) 쪽마루 우물마루(대청)
우물마루(툇간) 쪽마루 우물마루(대청)
1. 한옥, 초가에서 기와집까지
흔히 한옥이라면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사랑방벽이 담장처럼 빼곡히 줄지어 들어서 있는 인사동이나, 북촌 누상동 옥인동거리에 즐비했던 ㅁ자 집들이 연상되기 십상이다.
대개 이런 집들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안마당이 보이고 좌우에 부엌과 화장실이 있으며 마주보이는 대청마루 좌우에 안방과 건너방이 일렬횡대로 버티고 있기 마련이다.

" 지금까지 한옥은 이처럼 전통적인 생활발식을 지닌 주거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우리 뇌리에 떠오르는 한옥의 이미지가 이런 기와집이라 해도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남아있는 한민족의 살림집 이름을 조사해보면 지붕의 재료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붕을 기와로 덮으면 기와집, 짚으로 덮으면 초가집, 참나무껍질로 덮으면 굴피집, 억새나 갈대가 지붕의 재료라면 샛집, 나무를 넓게 쪼갠 것이나 넓적한 돌로 사용했다하면 너와집 등으로 구분되었다. "

그렇다면 한옥, 즉 우리가 전통가옥이라고 부르는 것을 조선시대 기와집으로 한정하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살림집 가운데 기와집은 사대부 집안이나 부잣집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했던 가옥형식이었고, 대다수의 백성들은 기와집이 아닌 초가집과 샛집, 너와집에서 살았다.

특히 기와집은 초가나 황토집과는 달리 기와를 굽고 얹는데 적지 않은 비용이 추가되므로 경제적인 여력이 있었던 권문세가나 대신 등의 벼슬아치, 부유했던 중인계층들이 살았고 시골에 지어진 기와집은 그 지역 문벌을 가진 지방 유림세력과 토호들이 살았다. 이렇듯 기와집은 ‘고대광실(高臺廣室 규모가 크고 잘 지은 집)'이란 말도 있듯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기와집이 설사 지방에 있다 해도 소작농을 거느렸던 지주계층이 살았던 곳이므로 주변에 산재한 소작농의 살림집보다 훨씬 높은 곳에 높게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소작인들이 살았던 주거 공간은 낮고 작게 지어졌으며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했다. 이런 서민들의 집은 지붕의 모습과 짓는 형태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고 그 종류도 매우 다양했다.

우선 서민들이 주로 생활했던 전통 가옥들을 보면 초가집이나 너와집, 그리고 샛집, 토담집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집들은 자연에서 얻은 재료 그대로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초가를 예로 든다면, 한해 농사를 짓고 나면 볏단이 쌓이고 농부들은 들녘에 즐비한 나락을 다듬어 이엉을 엮어서 초가지붕을 이었다. 초가지붕의 볏짚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그 안에 늘 공기가 머물러 있어 여름철에는 내리 쬐는 햇볕을 감소시키고, 겨울철에는 집안의 온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준다. 또한 볏짚은 표면이 비교적 매끄러워서 빗물이 잘 흘러내리므로 두껍게 덮지 않아도 물이 스며들 염려가 없고 누구든지 쉽게 지붕을 이을 수 있어 편리하다. 또 초가지붕은 짚 자체가 지닌 성질 때문에 따뜻하고 부드럽고 푸근한 느낌을 주며, 한 해에 한 번씩 덧덮어 주므로 각별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집은 언제나 밝고 깨끗한 모습을 갖출 수 있다.

산속 마을의 화전민들은 나무를 쪼개 지붕을 엮은 너와집이나, 억새를 이용한 샛집을 지어 살았으며, 강가에 사는 사람들은 강돌을 이용하여 토담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얹어 집을 지어 살았다. 벽을 치는 재료로는 밭에 흔하게 널려있는 황토를 사용했고 구들은 바위 돌을 얇게 쪼개어 사용했다.
기둥 역시 산에서 나는 목재를 사용했고 담장 또한 사방에 널려있는 강돌을 쓰거나 흙으로 쌓았으며, 흙과 돌 모래 강회를 사용하여 벽을 만들었다. 이렇듯, 한민족의 삶은 자연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자연과 가장 가깝게 생활하면서 이에 순응해왔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구하기 쉽고 사용하기 좋은 재료(목재와 볏짚, 너와, 억새, 황토, 돌)들로 적절한 모양새를 갖춘 주거 공간들을 집으로 만들어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2. 한민족의 주거공간
집이란 사람들이 살아온 삶을 담고 있는 일종의 그릇, 질그릇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한옥이란 단순히 기와집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재료를 현실에 맞게 구성하여 건축양식을 발전시키고 시대상을 반영한 주거공간을 만들어온 매우 포괄적인 콘텐츠를 지닌 단어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한옥은 한민족의 다양한 살림살이를 담고 있는 살림집을 이르는 말로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말뜻으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살림집 아파트는 한옥과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해야 될까. 지금까지 한옥이라는 말은 한민족이 살아온 옛집들의 공간형태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현대식 생활을 수용한 건축양식과 한옥의 연관성을 생각하기에는 상당한 저항감과 갈등이 생겨난다.
더구나 한옥은 인구밀도가 낮은 전원적이고 단층 중심의 수평성이 강조된 경관 구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현재의 아파트는 인구밀도가 높을 뿐더러 수직성이 두드러진 도시중심적인 경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옥과 아파트가 어울리는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경관의 수평적 구조와 수직적 구성 사이에 상당한 문명적 충돌이 생기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한옥의 정의로는 한민족의 현재와 미래상을 거론하기에 부족한 것일까. 이러한 의구심은 동시에 이미 역사성을 지닌 한옥이라는 단어를 지속 가능성 있는 개념으로 재정리해야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살아온 집인 한옥이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집을 포괄하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옥이란 한민족이 옛날부터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삶을 담는 집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포함할 최대공약수적인 사고와 의. 식. 주 생활습관의 실체는 분명 있을 것이다.
3. 자연과 더불어 완성된 한옥
지속가능한 한옥의 이해, 그것은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우리자신의 생활습관과, 그에 어울리는 생활공간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한민족은 지금까지 자연환경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이들이 만들어낸 공간 시스템은 무엇일까.
한민족은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다. 기후에 맞는 생활공간을 만들어왔던 과정을 들여다보자. 한민족이 살아온 한반도는 사계절이 뚜렷하기 때문에 철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덮고 자는 침구도 달라져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든다면 연간 평균기온만 하더라도 같은 위도상의 다른 지역보다 낮아 북부는 섭씨 10도 이하, 중부는 10~12도, 남부는 12~14도다. 또 겨울이 길어 11월부터 3월까지 무려 다섯 달 동안 평균기온이 영하 이하인 날씨가 계속된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만주 대륙과 시베리아 지방으로 연결되어 겨울이 길기는 하지만 삼한사온, 이한오온, 오한이온 등 대개 일주일을 주기로 기온이 변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추위를 견딜 수 있다. 여름에는 약 6월부터 9월까지 4개월간 섭씨 18도 이상이 지속되며 8월은 기온이 높아 30도 이상의 날씨가 지속된다. 일사 시간이 제일 긴 달은 7월이고 가장 짧은 달은 12월이다. 강수량은 연평균 600~1500mm이고 대부분 여름에 집중적으로 비가 오는데 6~8월의 강수량이 일 년 강수량의 50~60%가 된다.
지형과 위도의 차이에 따라 지역별 기후가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기후를 고려한 주거공간의 모습도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의 지붕 경사는 급한 반면, 건조한 지역의 지붕 경사는 완만하다. 추운 지역의 집들은 보편적으로 보온과 방풍을 위해 벽을 두껍게 하고 천정을 낮게 하여 온돌로 덥혀진 훈기가 오래 지속되도록 폐쇄적인 가옥구조가 특징으로 나타난다. 이에 반해 기온이 비교적 따뜻하고 비가 많은 남쪽지역에서는 통풍을 위한 개방적인 가옥구조가 중요한 요소로 나타난다. 기후와 관련하여 지방별 주택평면을 분류해보면 차이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북부지방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으로 한서의 차가 커서 여름철 더위보다 겨울철의 추위가 훨씬 심하다.

그러므로 방한과 방온을 고려한 평면 형식으로 방의 배치가 두 줄로 배열되는 겹집구조를 가지게 되는데, 함경도 지방의 주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쪽지방은 여름이 길고 무더운 기후적 특성을 갖고 있으므로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장치로서 처마가 깊고 통풍이 잘 되는 마루구조를 지닌 가옥구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사람들의 활동이 비교적 마당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거공간을 여러 채의 건물로 분산시키는 방법이 발달하였다. 따라서 살림채의 규모가 비교적 작은 방들이 한 줄로 배열되어 통풍에 유리한 홑집구조가 발달되었다. 말하자면 온돌은 겨울이 길고 추운 북쪽지방에서 발달하여 점차 남쪽지방으로 전파된 반면, 마루는 여름이 길고 무더운 남쪽지방에서 발달하여 점차 북쪽지방으로 확산된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눈이 많이 내리는 강원도와 울릉도(연간 월평균 강설량은 북부가 40~70mm, 중부가 40~100mm이며 남부는 추풍령과 목포 지역의 50mm를 제외하고는 20mm정도이다.)의 주거형태를 조사해보면 울릉도의 귀틀집과 우데기에서 특수한 외벽구성이 나타난다.
이는 한옥이 대륙적이면서도 해양적인 이중의 성격을 갖는 주거유형이기 때문이다. 즉 온돌과 마루라는 대조적인 바닥 구조를 기본으로 홑집과 겹집, 그리고 외벽구성 등 바닥과 벽, 채의 다양한 구성개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옥이 보여주는 주거환경의 다양한 구성은 기후 환경과 생활환경을 잘 반영한 주택유형으로서 세계에서도 유일하다.
◈ 한옥의 탄생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백두대간과 한옥 : 자연조건
동북아시아의 중심 백두산, 이 산에서 위로 가면 동쪽으로 만주벌이 나오고 서쪽으로는 요동벌이 나오며, 남뽁으로 뻗어내린 산맥은 한반도를 만들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에 솟아오른 백두산, 동쪽으로 험한 준령들이 줄기차게 이어져 있고, 서쪽으로 압록강을 따라 가지치기를 시작하면서 인체로 치자면 목을 만들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선 백두대간은 태백산을 허리로 세워 올려 나아가다가 남해에 이르러 조용히 내려앉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산맥은 반도의 70%를 차지하면서 삼천리를 흘러내려오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산과 강을 낳았고 마을을 만들었다.

이름 없는 수많은 산들은 그저 땅만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저마다 가슴 속에 품었던 물을 골짜기를 통해 땅에 흘려보냈다. 그 물줄기는 동해로 흘러 평야지대를 적셔주는 크고 작은 강이 되었다.

한반도의 산 중에서 머리에 물을 이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 바로 백두산과 한라산이다. 반도의 시작과 끝에 서 있는 두 산은 하늘 못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비슷하다.

백두산과 청북정백 . 청남산맥의 분기점인 낭림산과 묘향산, 한북정맥의 분기점인 분수령의 사이마다 관서지방과 관북지방형 가옥이 들어섰다.
겨울이 길고 한랭한 관북지방에서는 田자형의 방 배치와 정주간(鼎廚間 부엌과 안방 사이에 벽이 없이 부뚜막과 방바닥이 한데 잇닿은 곳)을 찾아볼 수 있다.
북부지방의 가옥 형태는 일반적으로 방의 배치가 田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방들은 방과 방이 직접 통하도록 복도나 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방과 부엌 사이에 있는 정주간은 벽이 없어 주방 작업이나 가족들의 식사 또는 휴식의 장소로 사용되어 지금의 거실과 같은 공간이었다.

田자형의 평면 형태는 함경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평안도 지방에서는 가끔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형태이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의 경우는 一자형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북서풍의 영향이 강한 관서지방에서는 ㄱ자형의 가옥구조가 많이 나타나며, 넓은 대청마루를 찾아보기 힘들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줄기를 내린 두문동재 정상에 서면 절대 놓칠 수 없는 볼거리 중의 하나가 바로 매봉산이다. 매봉산의 봉우리(1,145m)에서는 백두대간과 갈라서는 낙동정맥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데 한 맥이 서진하여 속리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을 만들고, 이 둘은 한강을 끼고 있는 중부지방을 형성하고 있다. 중부 지방가옥은 주로 ㄱ자형과 ㄴ자형, ㅁ자형의 구조가 많다. 일부 지역에 있어서는 一자형도 분포하고 있으며, 강원 산간 지방에서는 田자형 주거도 가끔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주거의 평면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기후적으로 북부와 남부의 중간 지역에 해당함으로써 양 지역의 평면형태가 절충되었기 때문이다. 중부형 가옥은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일부 지역이 속한다.

" 백두대간은 덕유산을 거쳐 장안치(長安峙)에 이르러 금남호남정맥을 만들고 다시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뻗어나가는 호남정맥을 만든다. 덕유산 마루의 백두대간 가운데 으뜸은 남덕유산(해발 1507)이다. 남덕유산 남쪽으로는 육십령을 향하여 백두대간이 흘러가고, 동쪽으로는 금원산(해발 1353)을 지나 진주 땅까지 흘러간다. 육십령이 백두대간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고개라면 남령과 무령고개는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 땅으로 뻗어나가 백두대간과 나란히 남북으로 걸려있다. 호남의 줄기인 이들 산맥이 전라남북도 지방과 충청도 일부지방을 지칭하는 서부지방을 형성하고 있다. "

이 지역 가옥구조는 남부지방의 一자형 3칸 집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서부 해안지방의 칸잡이(집 규모를 설정할 때 기둥과 기둥사이가 몇칸인가를 결정하는 것)는 네칸 또는 다섯칸잡이 집이 많이 지어졌다. 네칸 집의 평면은 집 중앙에 주로 마루방을 두고 양쪽에 건넌방과 큰방을 두는 형식인데 이때 부엌은 왼편 머릿칸에 두고 머릿퇴를 달아 모방이나 정지방을 만들어 사용한 집도 있다.
그리고 툇마루로 된 다섯칸잡이 집에서는 주로 부엌을 가운데에 두고 양쪽에 큰방과 건넌방을 두었으며, 초가의 경우 지붕 줄매기는 서해안 지방에서 가끔 볼 수 있는 마름모매기의 기법과 일자매기를 주로 했다. 기후가 따뜻한 남부지방에서는 일자형의 홑집구조가 주로 나타나며, 여름을 시원하게 보내기 위한 대청마루가 안방과 건너방 사이에 존재한다.
남부지방 중에서도 섬 지역인 제주도와 울릉도의 가옥구조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과 관련하여 독특한 구조가 나타난다. 제주도는 기온이 연중 온화하므로 난방의 필요성이 적다. 따라서 집 중앙에 있는 마루를 중심으로 방과 부엌이 분리되어 있으며, 곡식 등을 보관하는 창고 역할을 하는 고팡이라는 특이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특히 눈이 많이 내리는 울릉도에서는 강설에 대비하기 위해 우데기라는 독특한 가옥구조를 갖추고 있다.
바람이 심한 해안지방이나 북서풍의 영향을 많이 받는 평야지역에서는 강풍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독특한 가옥구조가 나타난다. 예를 들어 호남지방에서는 바람을 막기 위해 대나무로 집 둘레를 두르는 등 방풍림을 조성하거나, 제주도에서는 돌담의 높이를 높게 하여 강풍의 피해를 막으며, 또 지붕도 강풍에 잘 견디도록 새끼나 그물로 얽어맨다.
2. 한옥에 반영된 사회질서와 생활상
전통적으로 한민족은 질서를 숭상해왔다.
그래서인지 오랜동안 유겨적인 가치관을 지켜오며 살아왔다.
이러한 질서에 대한 생활공간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이 바로 조선시대이며 이 시기 문화는 신분제도인 양반, 중인(中人), 이교(吏較 하급관리층),양인(良人),천안(賤人)의 다섯계급으로 구분되어 나타난다.
양반은 동반과 서반의 문무관을 총칭하는 것이나 실제로는 문, 무 각 9품의 품관 및 이러한 관직에 임용될 자격이 있는 신분을 통칭하는 것이다. 양인과 양반의 중간계급인 중인은 높은 관직의 벼슬은 할 수 없었고 내의원(內醫院), 사역원(司譯院) 등의 직업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교는 관료와 평민의 중간계급으로서 역시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였고, 양인은 일반백성을 칭하는 것이었으며, 천인은 최하층에 속하는 백성으로서 천한 직업에 종사하면서 모든 권리의 제한을 받는 신분이었다.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솟을대문이 있는 주택을 상류 주택이라 한다. 이들 상류 주택은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지었으므로 규모가 컸고 주택의 장식에도 섬세하게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주택의 기능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도 높은 집들이다.

신분이 낮은 농민이라도 재력이 있었으면 규모가 큰 중류 주택에서 살았으며 사대부, 양반과 같은 상류 층중에서도 경제력이 없거나 안빈낙도의 선비정신을 중히 여겼던 사람들은 서민 주택에서 살았다. 민가(民家)란 백성의 집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중. 하류층의 일반 서민들이 살았던 집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초가지붕은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흔히 쓰인 서민주택의 지붕형태이다. 민가의 형태는 지형적, 기후적 여건, 지방의 경제상태 등에 따라 규모나 건물 배치 방식이 달랐으며 특히 기후의 영향으로 지방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닌다.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했으므로 주택을 지을 때도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하여 대부분 방과 대청, 부엌으로 구성된 단순한 구조를 지녔다.

일반 주택에서 방은 열린 공간인 대청과 반대되는 폐쇄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적인 공간이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인 전통가옥의 방은, 잠을 잘 때는 침대 대신 따뜻한 구들 방바닥 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낮에는 의자대신 방석에 앉아 지내는 좌식생활을 하도록 되어있는 다목적 사용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 바로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방을 늘 청결하게 유지하였다. 방의 내부는 모두 벽지나 천장지를 발랐으며 바닥은 장판지로 마감하였다.


이러한 자연과 사회적 조건 때문에 한옥은 나름의 특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산자락에 의지해 지으면서 결코 산을 깍지 않고 주춧돌도 원래 자연에 있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건축재로도 목재와 흙을 중심으로 자연과 함께하는 재료들을 사용했다.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온돌과 마루가 공존한다는 것이며 처마를 깊숙이 뺀다. 한옥의 평면에 온돌과 마루가 공존하게 된 것은 추운지방의 평면과 따뜻한 지방의 평면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한옥만이 갖고 있는 특징으로 사계절의 냉난방을 위한 것이다. 집은 쾌적해야 함과 동시에 명랑하고 밝아야 한다는 것으로 남향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으며 지붕의 처마는 적당한 하절기 직사광선을 피해야 하기에 깊숙이 내리게 되는데 자칫하면 무거워 보일 수 있으므로 추녀를 잡아 올려 솟아 오르게 만들었다.
한옥의 건물배치는 좌우대칭이 아닌 비대칭적인 배치를 하는데 각 채들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시원하게 배치된다. 대지가 경사지일 때는 깍지 않고 경사를 그대로 활용하거나 흙으로 수평을 잡은 다음 중요건물을 높은데 두고 부속건물은 낮은데 두어 방마다의 서열이 존재하며 심지어 방바닥도 윗목과 아랫목이 있다.
◈ 역사 속 한옥 이야기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BC 8000년 경)에 시작된다.
이시기를 농업혁명(Agricultural Revolution)이라 하는 것은, 수렵 및 채취를 통해 식량을 조달했던 그 이전의 생활방식과는 달리, 신석기시대 이후 농업을 통해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 인류의 삶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 까닭이다.

신석기 농업혁명으로 사람들은 유랑민에서 정착민으로 변하게 된다. 자연히 농경지 부근에 취락이 형성되었는데, 처음에는 촌락에 불과했던 취락집단은, 그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도시를 형성하게 된다.
신석기인들은 땅을 파고 지붕을 씌운 움집을 만들고 그곳에 살면서 씨족마을을 형성하기도 했다. 주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집을 지었던 이들은 불을 피우는 화덕을 갖춘 움집에서 주로 살았는데 움집은 가장 원시적인 초가집이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집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 대부분 30cm∼1m 정도 땅을 파서 지었다. 움집의 크기는 10∼50㎡이며 그 가운데 가장 큰 것이 20㎡ 정도이다.
이들은 여러 가족이 혈연을 매개로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마을의 성격은 친족 내부의 남녀간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씨족공동체였을 것이다. 이들 씨족공동체는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며, 그로써 얻은 생산물을 공동분배하는 평등사회였다. 하나의 씨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곧 그와 족외혼을 하던 다른 씨족들이 근처에 더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사이에는 혼인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교환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일정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해안가에 거주하던 신석기인들은 어로활동의 결과물로 패총을 남겼다.
우리나라의 신석기 사람들은 기원전 3000~2000년 무렵에 야생동식물의 채집에 의존해 온 생활형태에서 벗어나 가축을 기르고 경작과 재배를 통해 곡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주거지도 구릉지대로 옮겼는데, 후기 빗살무늬토기의 바닥이 평평해지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 것으로 생각된다. 농경이 시작되면서 해안과 강변에 거주했던 빗살무늬토기인들은 점차 내륙지방으로 진출했는데, 이들은 원형 또는 방형의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웅기(雄基)의 패총 움집에서는 오늘날의 화덕과 같은 난방장치도 발견되었다.
한편 1983년 5월에는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平海邑) 후포리(厚浦里)에서 BC 10세기 전후로 추정되는 신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이 유적은 황갈색 점토층에 인골(人骨)과 더불어 돌도끼가 널려 있는 한국 최초의 신석기시대 매장시설(埋葬施設)이다. 그 양식은 돌도끼를 무수히 깔고 그 위에 세골(洗骨)한 것으로 보이는 인골을 안치하는 방식으로 3∼4층위를 이루고 있다. 이제까지 신석기시대 유적은 대부분이 주거지(住居址)였는데 매장형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특히 돌도끼의 모양이 종래의 민무늬토기시대의 것과는 전혀 다른 특징을 띠며 인골과 돌널(石槨)이 그대로 발견되어 신석기시대 묘제(墓制)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청동기 시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넓은 들판을 끼고 있는 낮은 언덕에 새로운 삶의 터를 잡고 더욱더 활발해진 농경생활을 영위하였다.
한곳에 여러 채의 집을 짓고 살았던 것으로 보아 사회규모가 이전보다 더욱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거대한 고인돌을 만들기 시작한 이 시기는 청동기를 소유한 집단이 지배계층으로 자리잡는 시기이다.

한국의 청동기시대가 확인된 것은 1950년대에 이르러서였는데 이 시대의 대표적 유물과 유적지인 민무늬토기 · 간석기 · 고인돌 등을 통해서 볼 때, 세부적으로는 다양성을 지니면서 전체적으로는 동질적인 문화를 지니고 있던 시대였음이 밝혀졌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강가의 언덕이나 내륙의 구릉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신석기시대에 비해 집을 지었던 구덩이의 깊이는 얕아지고 규모는 약간 더 커진다.
움의 형태는 네모진 것이 많으나 서남부지방에서는 둥근 형태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움집의 크기는 대체로 한 변이나 지름이 4~7m 정도이며 내부에는 냇돌을 돌리거나 구덩이를 약간 파서 만든 화덕자리(爐址)가 있다. 큰 집터에는 화덕자리가 여러 군데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주거형식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 움집과 청동기시대 움집을 살펴보면, 대개 움집의 위치, 화덕의 위치, 규모, 움집 모양새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우선 신석기시대 움집은 강가나 해안가에 주로 위치하고, 움집의 모양은 원형이나 모가 둥근 방형이다. 그리고 화덕은 움집 정중앙에 위치한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로 가면서 움집은 주로 구릉지대로 옮겨지고 집단취락 형태로 조성되며, 규모도 커짐과 동시에 움집 모양 역시 직사각형으로 바뀐다. 그리고 화덕은 중앙에서 구석으로 옮겨지고, 여러 가지 물건을 별도로 두는 창고시설 등이 따로 만들어진다.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집 내에 화덕과 저장 구덩이만 만들었고 단순한 구조로 이루어져 방은 1개에서 2개뿐이었다.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생활의 규모가 커지자 같은 지역의 집터라 하더라도 그 넓이가 다양하여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의식 장소 등으로 분화해 감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에 이르게 되면 움집이 지상 가옥화되어 땅을 파지 않고 집을 짓고 살았다.
3. 삼국 시대
삼국시대 들어서면 땅위에서 얼마간의 깊이로 움을 파서 그 위에 지붕을 덮어 만든 수혈주거로부터 땅 위에 직접 집을 짓는 지상주거로 집의 형태가 바뀐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통해 삼한(三韓)시대에 이미 완전한 목조건축 양식이 완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만들었을 도구들이 청동기 기대 유구 가운데 출토되고 있으며 당시 완연한 목조 주택의 유형을 보여주고 있는 유물로서 기원 후 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가형토기(家形土器)가 나타난다.

고대 삼국 중 가장 먼저 문화의 중흥을 이룩한 고구려는 가장 먼저 양식화된 목조건축 양식을 완성했다. 이러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기록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며 촉과 홈 그리고 장부를 가공했을 만한 청동기 시대 목재를 가공했을 공구류(끌, 대패날, 자귀)등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고분벽화를 보면 왕궁(王宮), 관부(官府), 사원 등을 지을 때 이미 기와를 얹었고, 민가는 초옥(草屋)으로 지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 주거형식의 가장 기본이 되는 온돌구법은 이미 고구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이르면서 보편화되었다. 이렇게 발달한 고구려의 양식은 백제에 전수되고, 이것이 백제 고유의 문화와 융합하여 양식으로서 완성되었으며, 이러한 문화가 일본에 전해진 것이다.
백제의 일반주택은 유구(遺構 건축 구조를 알아볼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유물)통해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백제계 불감을 보면 하앙식 구조의 목조건축이 보편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인 신라의 경우, 일반적인 건축 양식은 두 나라와 같은 것이었으나, 당(唐)나라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가미되면서 더욱 화려한 양식으로 발전하였고, 계급에 따른 주택의 규모를 법으로 제한할 정도로 건축문화가 성숙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골품제도(骨品制度)에 의한 신분 및 자격에 따라 건물의 규모 , 기단(基壇) , 두공(枓) , 대문형식 및 장벽(牆壁) 높이, 그리고 실내장식의 정도까지를 규제하였고 이는 삼국사기 옥사조에 기록되었다.

4. 고려 시대
고려시대의 건축은 신라의 것을 계승하여 보다 풍요로운 주택문화를 누렸다.
자료의 부족으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당시 귀족계급과 서민계급간 주택은 매우 큰 차이를 보인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 귀족계급들은 침대와 의자를 사용하였으며, 다양한 가구와 고급품으로 치장한 호화로운 입식 중심의 주거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민가(民家)에서는 주로 부분 온돌인 쪽구들 형태였고 흙바닥에 자리를 깔아 생활하는 정도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부유한 민가는 기와를 이어 지붕을 만들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풀이나 짚을 사용했고 좌식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때 널리 유행했던 건축양식은 주심포계이며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그리고 봉정사 극락전과, 강릉객사문, 수덕사 대웅전 등이 그것이다. 장려 웅대한 다포계 양식은 말기에 나타난다.
화려함과 웅장함을 지닌 고려시대 목조건축은 조선 초기 경복궁 창건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시대 전기까지 영향을 끼쳤다.

5. 조선 시대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전승되었으나, 차차 다포계와 익공양식 그리고 도리집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조선시대의 주택 유형은 상류주택과 서민주택으로 뚜렷히 구분된다. 주거공간은 거주자의 신분과 성별에 따라 크게 세가지 영역으로 확실히 구획되어 사용된다.

대문 · 노비숙소 · 창고인 행랑채와 행랑마당과 주로 남자 주인의 거처로 쓰이는 사랑채와 사랑마당, 그리고 여자들과 유아들의 점유공간인 안채와 안마당이 그것이다. 이 세 영역의 공간구획은 점차 강한 폐쇄성을 이루며 배치되었다.
주택을 지을 때는,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이 넓게 터져 있으며 왼쪽으로부터 앞쪽을 강이 굽이치며 흐르는 곳을 택하였는데, 주거의 중요부분을 남향과 동남향으로 배치하는 것을 가장 좋게 여겼다. 구조는 일반적으로 석축기단(石築基壇) 위에 목구조로 세우며, 지붕은 주로 합각지붕을 이루고, 행랑채와 일부 부속건물은 맞배지붕 또는 우진각 지붕 등으로 이었다.
조선 전기부터 가사규제(家舍規制)가 계속되어 신분계급에 따른 주택 규모와 형식이 제한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유명무실해져 궁전의 침전건축(寢殿建築)을 모방하거나 서민들도 상류주택을 모방하였다.
자연과 풍토에 보다 긴박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던 민가는 간략한 목구조와 초가로 이루어지는 형식이 많았으며, 지역별 특성에 따라 각기 그 유형을 달리한다. 함경형(咸鏡型)과 서북형(西北型), 중부형과 서울형, 그리고 남부형으로 구분되는 민가의 유형들은, 북부지역이 주로 田형의 평면으로 정주간이 특색인데 비해, 중부지역은 ㄱ자형에 대청이 중심을 이루고, 남부지역은 一자형에 마루와 툇마루를 갖추어 중 · 북부보다 개방적인 것이 특징이다. 이들은 대체로 3∼5칸의 규모로서 큰 작업공간과 부속건물들을 갖추고 있었다.
6. 근대
조선말기 개항(開港)을 통하여 외국문물이 상륙함으로써 주택양식에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부산, 원산, 인천을 비롯한 개항장에는 각국의 거주지가 설정되고, 각국의 양식대로 가옥이 건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서구양식이 직접적으로 전래된 예는 별로 많이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여과된 양식주거(洋式住居)가 일본식 주거와 결합하였으며, 특히 국권피탈 이후에는 일본의 목조양식 자체가 수입되었다.

일본인들은 초기에는 조선의 가옥이나 목조양관(木造洋館)에 거주하였으나, 그 후 풍토에 맞게 온돌 난방장치를 하거나 벽을 두껍게 하고 창호면적을 줄이는 등 가옥을 변형하였다.
1905년 통감부 설치 이후 많은 관사건물이 건축되었는데, 이들은 양식의 접객부분을 채용하고, 다다미방과 온돌방에 양풍의 개폐창을 사용하여 서양풍의 외관을 하는 등 여러 양식을 절충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일양절충식(日洋折衷式) 주택의 영향으로 한국에도 콘크리트 · 벽돌 · 블록 등의 재료와 아스팔트 방수와 페치카 난방 등의 기술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들은 재래식 주택의 본질적 개선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한편, 주택공사업자들에 의해서 재래식 주택이 양산되었으나, 공사비의 절감과 구조의 간편화라는 요구로 인해 이러한 양식은 전통적인 주택도 아니고 기능적으로 우수한 서양식도 아닌, 구조와 세부적 변화에 그친 것이었다.
1930년대 초부터 차차 중류계급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일양절충식 주택이 보편화되었고 개량한옥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자의 것들은 현관부분을 강조하고 양풍 응접실과 일조(日照)가 좋은 위치에 거실을 둔 것으로 일제시대 일인들이 살던 주거지를 중심으로 주로 건축되었다. 한옥은 동서양 문물이 조우하는 상황에서 개량운동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부엌 개조, 찬방의 기능 부여, 행랑의 이동 및 집의 다층화 등 실현 가능성 있는 대안들이 쏟아졌다.
개량 한옥은 북촌 누상동 성북동 등에 아직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데 차츰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시의 인구집중과 일본인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주택난이 심화되었고, 1941년 조선주택영단의 창설과 함께 공업근로자를 위한 공동주택이나 연립주택 · 관사 · 아파트 등의 새로운 주거유형이 집중적으로 건설되었다.
8 ·15 광복 후 정치 · 사회적 불안정이 계속되고 자원도 부족할 뿐더러, 산업기반 또한 탄탄하지 못한 탓에 한국의 건설 동력은 움직이지 못했다. 특히 6 · 25 전쟁을 겪으면서 전 국토가 파괴되고, 북한에서 수백만의 피난민이 이주해옴으로써 한국의 주택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1960년대까지 이러한 어려움이 지속되다가, 정부가 공공주택을 건설하고자 노력하고 민간자본이 주택건설에 참여하면서 대규모 택지가 개발되고 주거의 질적 내용을 개선하고자 하는 노력이 1980년대까지 경주되었다. 급진적인 도시화로 생활양식이 급격하게 서구화됨으로써, 주택의 양식 또한 편익성과 기능성을 우선으로 구성과 설비로 바뀌고, 건설의 경제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한옥은 한국의 주거 전통성을 유지하기 힘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환경문제와 생태중심적인 주거공간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한옥의 생명력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간의 방황이 바로 우리 의식주를 그대로 담는 우리만의 주거양식이 소중함을 다시 일깨워주고 있기 때문이다.
◈ 한옥의 종류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기와집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기와를 쓰게 되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분명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의하면 대략 기원 전후에 궁궐이나 큰 건물에 기와를 덮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물로 알려진 법륭사를 지을 때 백제에서 기와 박사 네 사람이 일본에 건너와 기와를 구었다는 기록이 있어, 7세기 경 이미 기와 굽는 기술이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질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었던 듯하다.

기와는 주문 생산방식이었으므로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수량의 기와를 미리 맞추어 두거나 큰 역사가 있을 경우 근처에 가마를 만들어 필요한 기와를 굽기도 했다.

기와 쌓기는 먼저 암키와를 나란히 깔고 사이사이에 수키와를 덮고 나서, 수키와 앞에 흙과 백토로 빚은 아귀토로 막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잘 짓는 집에서는 암막새를 먼저 놓고, 암키와를 서너 겹으로 겹쳐 깔아서 한두 장이 깨져도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수키와도 역시 숫막새를 먼저 놓고 홍두깨흙을 얹은 뒤에 덮어 나간다. 지붕마루에는 적새라 하여 암키와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수키와를 덮는다.

기와를 쌓을 때 주인은 기와장이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데, 상량을 올리는 날이 목수의 생일이라 하듯 이날을 기와장이의 생일이라 한다.

따라서 암키와를 많이 덮을수록 지붕마루가 높아져서 집 자체가 커 보인다. 어떤 기와집에서는 적새 위에 수키와를 얹을 때 한가운데의 두 장을 서로 어스러지게 팔자(八字) 모양으로 마주 세워 두는 일이 있는데 이를 복문이라 한다. 기와를 쌓을 때 주인은 기와장이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는데, 상량을 올리는 날이 목수의 생일이라 하듯 이날을 기와장이의 생일이라 한다.

팔작지붕의 경우에는 지붕마루마다 망와라 하여 도깨비 모양의 암막새를 얹는다. 망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귀면(鬼面 귀신의 얼굴)에 가까우나 뒤에 점차 약화되어 왔으며, 곳에 따라서는 태극이나 주역무늬가 새겨진 것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사람 얼굴 모양의 기와를 많이 얹으며 꽃잎을 양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망와는 잡귀를 물리쳐 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2. 초가집
초가집은 볏짚으로 지붕을 만든 집이다. 볏짚을 언제부터 지붕에 덮기 시작하였는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벼농사가 시작된 삼국시대에 이미 등장했으리라 추측된다.
초가지붕을 잇는 방법은 비늘 이엉법과 사슬 이엉법의 두 가지가 있다. 전자의 경우 모양이 물고기의 비늘을 닮은 데에서 이름이 유래했는데, 짚의 수냉이를 한 뼘 정도 밖으로 내어서 엮는 방법이다. 길게 엮은 날개 두 장을 이엉꼬챙이로 꿰어 올린 다음, 지붕의 앞뒤를 덮고 남은 부분으로 좌우 양쪽의 벽을 가릴 수 있다. 수명은 사슬 이엉보다 오래 간다.

사슬 이엉은 수냉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일정한 크기로 엮은 날개 수십 장을 둥글게 말아서 지붕 위로 올린 뒤에, 멍석을 깔듯이 펴나가면서 지붕을 덮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수냉이가 처마 밑으로 오도록 깔고, 다음에는 이와 반대로 해서 덮어 나간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새끼를 늘여 서까래 끝에 잡아맨 뒤 용마루에 용구새를 얹어서 마무리 짓는다.

이 때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좌우양쪽으로 비탈이 지도록 솜씨 있게 엮어야 한다. 바람이 심한 곳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새끼를 그물처럼 엮어 지붕을 덮는다.

초가지붕은 대체로 지붕의 추녀마루가 처마 끝에서부터 경사지게 오르면서 지붕 중앙의 한 점에서 합쳐지는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룬다. 또한 겹집인 경우 까치구멍이라고 하여 용마루를 짧게 하고 좌우 양끝의 짚을 안으로 우겨넣어 까치가 드나들 만한 구멍을 내어 두는 경우도 있다. 이 구멍으로 집안에 햇볕이 들어오고 연기가 빠져 나가기도 한다. 이러한 구멍은 초가집뿐만 아니라 너와집이나 굴피집에서도 볼 수 있다.
3. 샛집
샛집은 주거지역의 주변에서 흔히 얻을 수 있는 풀을 이용한 집들을 말한다.
주로 들이나 산에서 나는 억새풀의 한 종류인 새풀을 베어서 썼는데, 수명이 20~30년 정도 되므로 볏짚으로 엮은 초가집보다 내구성이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새풀 이름은 각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왕골, 왕새, 세골, 갈대 등이 있다. 샛집 지붕은 볏집 지붕보다 경사가 더 급하고, 지붕이 무겁고 그늘져 습기 찬 곳은 쉽게 썩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갈아 끼워 사용하기도 했다.

낙동강 주변에는 갈대로 지붕을 이은 갈집이 많이 있었는데 창녕 하병수 고택에서 갈대로 만든 샛집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4. 너와집
너와를 강원도에서는 느에, 또는 능애라고도 한다. 너와는 2백년 이상 자란 소나무 토막을 세워놓고 도끼로 쪼갠 작은 널판을 말한다.

너와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으나 보통 가로 20~30cm, 세로 40~60cm이며 두께는 5cm 내외이며 수명은 10~20년이다.

너와를 지붕에 올릴 때 바람에 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거운 돌을 얹어놓거나 '너시래'라 부르는 통나무를 처마와 평행하여 눌러놓는다. 너와 쌓기는 지붕의 용마루 쪽으로부터 끝을 조금씩 물리면서 덮어 내려간다.

너와 70장을 한 동이라고 하며 한 간 넓이의 지붕에는 보통 한 동 반에서 두 동 쯤이 들어간다.


기와지붕을 수리할 때처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썩은 것을 갈아 내고 새것으로 바꾸어 끼운다.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에는 굴뚝으로 빠지지 못한 연기가 너와 사이로 뿜어져 나오므로, 지붕이 불에 타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원래 너와집은 수목이 울창한 지대에서 볼 수 있는 살림집으로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지역과 낭림산맥 및 강남산맥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산간지역,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지역, 울릉도 등지에 분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대체로 화전민들의 분포지역이다.

지역에 따라 평면형태와 구조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평면상으로는 홑집과 겹집으로 나누며, 지붕의 형태로는 우진각 ? 합각 ? 박공지붕 등으로 구분되고, 벽체 구성의 재료 차이에 따라 귀틀집? 토벽집 등으로 나눈다. 오늘날 너와집은 거의 사라졌고,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신리에 남아 있는 몇 채의 너와집이 중요민속자료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5. 굴피집
지붕에 너와 대신 참나무껍질을 덮는 집으로 한 지붕 아래 방과 외양간이 같이 있다.
집안에는 지금의 벽난로인 고콜, 불씨를 모아두는 화로인 화터, 호롱불을 설치하는 두등불 등을 두었다.

굴피는 상수리나무의 껍질로, 산간지대에서는 이것을 벗겨 지붕을 덮었다. 20여 년 이상 자란 나무의 껍질이지만 크기를 일정하게 벗기기는 힘들기 때문에, 이를 덮은 지붕을 보면 마치 누더기를 걸친 것처럼 어지럽다.

굴피는 대기가 건조해지면 바짝 오므라들어 군데군데 하늘이 보일 정도로 틈새가 많지만 비가 내리든지 하여 습도가 높아지면, 이내 늘어나서 틈을 메운다. 이음새에는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돌로 지질러 둔다. 굴피 지붕의 수명은 매우 긴 편이어서 '기와 만 년에 굴피 천년'이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6. 귀틀집
귀틀집은 목재가 풍부한 산간지대의 주민들이 짓고 살던 원시 가옥의 한가지다.
둥글이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겹쳐 우물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서 벽체를 삼으므로 이를 방틀집, 또는 말집이라고도 한다.
양끝을 우묵하게 쪼아 낸 자리에 나무를 얹어서 움직이지 않도록 하며 나무와 나무 사이의 벌어진 틈에는 진흙을 발라 막는다. 벽체가 완성되면 느리개(서가래 위에 걸치는 지붕 널)를 놓고 이에 산자를 깐 뒤에 흙을 발라 천장을 삼은 후 이 위에 지붕틀을 덧씌운다.

따라서 귀틀집의 지붕은 맞배지붕을 이루며 기둥은 천장에서 마룻대를 받치는 동자기둥 하나를 세울 뿐이다. 지붕틀과 천장 사이의 합각은 수장 공간으로 이용된다.

다른 나라에서는 서너 칸의 집을 모두 귀틀로 만드나 우리나라에서는 두 칸 방만을 귀틀로 하고, 부엌이나 마구 등의 공간은 일반 가옥처럼 널벽을 쳐서 벽을 삼고 나머지 공간은 기둥, 도리, 들보 등을 짜맞추는 가구식으로 꾸민다. 고구려에서는 부경이라 하여 창고를 귀틀로 짜서 만들었으며 최근까지 강원도와 경남에서 이를 흔히 볼 수 있었다.

귀틀집에 대해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변진조’에는 “나무를 옆으로 뉘어 쌓아 올려서 마치 감옥처럼 짓는다”고 기록되어 있어 이 집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귀틀집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만주, 시베리아, 미국의 록키산맥, 북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일대에도 퍼져 있었다.
7. 까치구멍집
까치구멍집은 안방, 사랑방, 부엌, 마루, 봉당 등이 한 채에 딸려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양통집의 속칭이다.

지붕 용마루의 양쪽에 공기의 유통을 위하여 구멍을 낸 모양이 까치둥지와 비슷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주택을 평면구성으로 볼 때 외통집 ? 양통집 ? 곱은자집 ? 겹집으로 나눌 수 있다.

양통집은 처음에는 대개 6칸 집인 것이 8칸 ? 10칸 또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였다.양통형 집은 안동지방뿐 아니라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해안 산간 지방에서 아직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구조가 한국집의 고대양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양통집은 처음에는 대개 6칸 집인 것이 8칸 ? 10칸 또는 그 이상으로 발전하였다. 양통형 집은 안동지방뿐 아니라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해안 산간 지방에서 아직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 구조가 한국집의 고대양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양톱집은 낙동강 유역에서 출토된 가야(伽倻)시대의 가형토기(家形土器)가 6칸 양통집과 외형이 같다는 점과, 근래에 발굴된 대부분의 선사시대 주거지가 모두 통간이기는 하지만 평면구성이 양통형이라는 점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 하급계층 사람들의 집이 반구덩식(半竪穴式)이었던 점으로 보아 양통집은 부유계층 사람들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8. 움집
움집의 바닥은 대부분 장방형을 이루나 방형의 것도 있으며 기둥을 두 줄고 세워서 별과 지붕이 나누어지고 지붕은 맞배지붕이나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룬다.
움집터는 압록강, 두만강, 대동강 그리고 한강 유역에 많이 발견되었다. 움막이 빗살문 토기 시대의 주거임에 반해, 움집은 농경이 발달한 민무늬토기 시대에 들어와 나타나기 시작했다.

움집은 벽과 지붕이 분화되어 움막처럼 땅을 깊이 파고 지을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벽이 땅으로 반쯤 들어가는 이른바 '반움집'의 형태로 등장했다가, 철기시대 초기에 들어 와서는 모두 땅 위에 세워진다. 지붕에는 용마루가 생겨났고, 이를 의지하여 원시적인 서까래를 걸고 짚 따위를 덮은 뒤에 흙을 얹었을 것이다. 지붕면에 채광 시설을 마련하고 맞배지붕의 좌우 양측에는 배연을 위한 구멍을 내었으리라 추정된다. 벽은 수직으로 세운 기둥과 기둥 사이에, 통나무나 널판을 가로 질러 대어서 꾸몄을 것이다. 이는, 지상에 세웠던 집자리에서 벽에 판자를 대었던 흔적과 불에 탄 널판이 나왔고, 기둥 자리가 촘촘하지 않고 띄엄띄엄 있던 점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움집은 규모가 커서 장방형의 한 면이 4~7m이고, 넓이는 50~60m2에 이른다. 그러나 서기 7세기쯤의 것으로 추측되는 경기도 파주군 덕은면의 집자리 중에는 깊이가 40~90cm, 동서 15.7m, 남북 3.7m가 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움집의 기둥 구멍은 모두 수직을 이루며 기둥이 주저앉는 것을 막기 위해 주추를 놓은 집도 있고, 간을 막은 흔적이 있는 집자리가 발견되기도 하여 공간 분화의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움막의 중앙부에 있던 화덕이 어느 한 쪽으로 밀려나 두 개의 화덕을 갖춘 집도 있고 출입을 위한 층계나 비탈이 없는 경우도 많다. 같은 움집 안에서도 안쪽을 상청, 가운데를 중청, 문간 쪽을 하청이라 하여, 노인들은 상청에, 그리고 젊은이들은 하청에 모여 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짚신 등을 삼는 작업을 하였다. 움집은 서너 집 내지 백여 호가 모여 마을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었다.
◈ 한옥의 주요 구성요소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기단
건물이나 탑, 기타 이와 유사한 축조물의 바닥면을 주변보다 높게 올려 쌓은 것으로, 재료에 따라 흙이나 돌, 전돌 그리고 기와 등으로 쌓기도 한다.
돌로 쌓은 석축기단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쌓는 방식에 따라 자연석 기단과 가구식 기단으로 구별된다.

자연석 기단 : 비슷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은 채 외부에 돌출된 면만 대충 다듬어서 쌓는 것을 말한다. 쌓는 방식에 따라 각 단의 층이 구분이 되도록 쌓는 ‘바른층(고른층) 쌓기’와 성벽의 석축과 같이 층의 구분이 없이 쌓는 ‘허튼층(난층) 쌓기’로 분류된다.

가구식 기단 : 쌓는 돌을 모두 정교하게 다듬어 맞추어 올리는 기단으로 지면에 놓는 지대석과 지대석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는 면석, 그리고 면석을 덮어 기단의 바닥면을 이루는 갑석으로 이루어져서 가구를 쌓는 것처럼 구성한 기단을 말한다. 특히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기단에서는 면석과 면석 사이에 목조건축의 기둥과 같은 형태의 탱주를 조각하여 넣거나 면석에 연화문이나 십이지 신상 등의 문양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2. 초석
기단 위에 놓아 기둥을 받치는 기초이며, 상부하중을 지면으로 전달 분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부재를 말한다.
형태에 따라 원형, 사각형, 팔각형 등으로 가공하거나 적당한 크기의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궁궐이나 주요 사찰 등의 건물에는 정교한 초석을 사용하였으나 일반 주택이나 기타 건물들에는 가공된 초석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마무리 정도에 따라 정평주초(正平柱礎)방식과 덤벙주초(柱礎) 방식으로 구분된다.

3. 기둥
초석 위에 세워서 지붕과 가구. 즉, 상부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부재를 말한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만들어지는 공간을 주칸이라 하는데 주칸 치수는 목재의 길이로 인하여 대부분 일정하지만 칸의 위치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지니고 있다.

정면의 중앙칸은 출입을 해야 하므로 약간 넓고 귀기둥과 연결된 측면은 역학적인 취약성 때문에 칸 너비를 좁게 하는 편이다. 기둥은 세워지는 위치에 따라 평주기둥 ? 귀기둥 ? 내진 ? 고주로 나누어지며 마감 형태에 따라 원기둥과 각기둥으로 구별되며 경우에 따라 육각과 팔각기둥도 있다.
원기둥은 궁궐의 정전이나 사찰의 주불전 등 규모가 큰 중요 건물에 사용되며, 각기둥은 주택이나 사찰, 궁궐의 부속 건물 등에 주로 사용된다. 원기둥은 나무를 다듬는 방법에 따라 배흘림, 민흘림으로 분류된다. 시대적으로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의 주심포계와 다포계의 건물에 배흘림기둥이 주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의 건물에서는 민흘림기둥이 많이 나타난다.

배흘림 기둥 : 기둥 전체길이 중 아랫부분에서 1/3 가량의 높이까지 기둥의 두께가 점차로 커지다가 그 위로부터는 서서히 좁아져 항아리와 같은 형태를 가진 기둥을 말한다.

민흘림 기둥 : 기둥 아래쪽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서서히 두께가 좁아지는 기둥으로서 사다리꼴과 같이 일정한 비율로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각 지점마다 체감되는 비율을 달리하여 좁아지는 기둥을 말한다.

각 기둥 : 기둥의 상하 모두가 같은 크기의 두께를 가지는 기둥을 말한다.

귀기둥은 일반 평기둥보다 약간 크게 만들어 솟아오르게 한다. 이러한 귀솟음을 하는 이유는 건물의 모서리에 세우는 귀기둥의 기둥높이를 평주 보다 약간 높게 치목하여 귀기둥에 쏠리는 상부의 무게로 인한 침하에 대비할 뿐만 아니라 건물의 입면상 양쪽 끝이 쳐져 보이는 시각적인 착시 교정의 효과까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건물의 바깥쪽에 세워진 기둥을 수직으로 세우지 않고 기둥머리를 건물의 안쪽으로 약간 기울여 세우는 안쏠림을 줌으로서, 가구 틀을 더욱 긴장하게 만든다.
기둥의 밑둥과 주춧돌이 밀착되도록 하는 작업을 그랭이질이라 하는데 자연 주춧돌의 모양에 맞춰 기둥의 밀착 부분을 맞추는 방법이다. 그렝이질이 능숙하여 기둥 절단이 정확하면 기둥과 주춧돌이 정교하게 밀착되어 습기나 벌레가 방지되고 더 견고해진다.
4. 공포
간단히 포라고도 한다.

목조건물에서 지붕 처마의 하중을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위에 주두, 소로, 첨차, 제공 등의 부재를 층상으로 구성하여 서가래 기울기를 맞추는 일련의 부재세트를 말하는데 양식에 따라 다포계, 주심포계, 익공계 등으로 구분된다.
5. 가구
기둥 위나 공포의 위에 얹어 지붕의 틀을 구성하는 부재들로 지붕의 무게를 고루 분산시키면 내부공간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 구조나 구조물을 총칭한다.

지붕가구는 보, 도리, 대공 등의 기본 부재로 이뤄지며 이들 상호간의 맞춤이나 형태 등에서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일반적으로 도리의 수에 따라 3, 5, 7, 9량집으로 구분한다.

6. 시래
추녀 끝에 덧대어 설치함으로서 추녀가 더 길게 뻗어나가게 하는 부재로 겹처마를 이루게 하는 굵은 부재를 가리킨다.

선자서까래가 사래 좌우에 배설된다. 사래는 추녀 끝에 있으면서 끝이 노출되어 썩을 염려가 있으므로 토수(吐首) 등을 씌우거나 귀면와(鬼面瓦 귀신얼굴을 한 기와)를 박아 넣는다. 추녀와 사래를 설치할 때 그 곡률(曲率)을 얼마나 잡아 주느냐에 따라 처마의 앙곡(仰曲)과 안허리가 잡히는 것이므로 그 제작 기법은 까다롭다.
7. 지붕
내부 가구구조를 덮는 외피구조를 말하는데, 기와와 이를 지지하는 지붕판을 말하며 지붕 형태에 따라 추녀의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좁은 의미로는 지붕잇기 마감재 부분을 말하고, 넓은 의미로는 지붕잇기 밑바탕(지붕널)까지를 말한다. 더 넓은 의미로는 지붕틀까지 포함해서 말한다.
지붕은 벽체나 바닥과 더불어 건축공간을 구성하고, 외부로부터의 비?눈?이슬 등을 비롯해 온도?습도?음향?일광?바람?시선?외적 등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벽체와 같이 외부에 면해 있으므로 의장적(意匠的)으로도 중요한 요소가 되고, 그 형상이나 마감재료는 건축물 외모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한국과 같이 장마철이 있는 곳에서는 지붕은 공간을 덮어 주는 구조일 뿐 아니라, 건물 외부로 연장되어 벽체?창?문 등을 보호해 주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처마구조가 많이 발달해서 한국건축의 특유한 공포의 아름다움을 만든다.

지붕은 자체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벽체구조와 긴밀한 관계가 있고, 지붕구조는 벽체 각 부분을 상호 연결시켜 준다. 아치나 셸 구조에서는 지붕과 벽과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서 형태적으로나 구조적으로 지붕과 벽을 구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 한옥의 건축 과정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공사준비와 치목

집을 짓는 순서 중 제일 먼저 할 일이 좋은 집터를 잡는 일이다. 집터는 대개 지관을 불러 좌향(坐向)을 보는데, 이 때 집 주인이 될 대주(大主)의 운세와 함께 마을의 산세와 지세를 보며, 오목하고 양지바른 곳을 선택하여 주위보다 약간 높으면서 전망이 확 트인 곳이 가장 이상적인 집터로 본다. 따라서 방위는 주로 동향, 남향으로 앉히는데 마을의 지세에 따라 좌향이 정해진다.
집을 지으려면 집지을 나무와 땅을 마련해야 하는데 목재는 건조가 필요한 부재로서 중요한 재료이므로 미리 구입하여 가공해야 한다. 특히 한옥은 현장 조립성격이 강하므로 잘 건조된 부재를 치목하고 미리 마름질한 뒤 현장으로 가져오게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재를 현장에 잘 쌓아 두어야 한다.
한옥의 재목으로는 소나무를 가장 많이 사용하며 밤나무가 흔한 지방에서는 기둥을 밤나무로 사용하기도 한다. 밤나무는 지네가 모여드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나무의 내구성이 강해 목조집의 기둥으로 많이 쓰인다.
특히 대문이나 사립문 기둥을 밤나무로 만들면 도적이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는 미신도 있다. 기둥은 나무가 서있던 대로 위와 아래를 반드시 확인하고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무귀신(木神)이 발작하여 집안에 동티가 난다는 믿음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와 전혀 다른 재미난 풍속이 전해져 오고 있다. 오히려 기둥을 거꾸로 세워야 나무귀신이 놀라서 오히려 잡귀가 들어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갓기둥만 거꾸로 세우며 보기둥이나 안기둥은 똑바로 세운다, 또 기둥 중에 상기둥을 세울 때에는 식구 중 운세가 맞지 않는 사람은 절대 보아서는 안 된다는 미신도 있다.

그리고 헌집(舊家)의 재목을 사용할 때는 다른 구가의 재목들과 함께 섞어 사용해서는 안되며 구가의 재목과 새 재목을 혼용하는 것은 가능하다. 구가의 재목으로 집을 지을 경우라도 필히 마룻대는 새 재목으로 사용하여야 하며 안채를(위채) 뜯어다 행랑채(아래채)를 지어서는 안되지만 행랑채를 뜯어다 안채를 짓는 것은 가능하다.
그 이유는 안채를 뜯어다 행랑채를 짓는 것은 재목의 강등(降等)을 의미하므로 목신이 화를 내지만, 행랑채를 뜯어다 안채를 짓는 것은 행랑채의 승격을 의미하기 때문에 목신이 좋아한다고 한다. 이 밖에 선박이나 사찰에서 사용했던 재목은 가재목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고사목, 벼락 맞은 나무나 단풍나무 등도 사용하지 않는다.
공사는 대개 추운 겨울철과 장마기인 여름철을 피해 봄이나 가을에 시작한다. 집터와 좌향을 잡고 나면 택일을 하는데 택일은 땅을 파는 개토(開土 터 닦는 일)와 주추를 놓는 정초(定礎), 기중을 세우는 입주(立柱),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上樑), 입택(入宅) 등의 순으로 날을 받는다.
2. 개토와 토신제
개토는 집터를 닦기 위해 처음 땅을 파는 일로서 택일하여 지신(地神)에게 먼저 고사(告祀)를 지낸 후 일을 시작해야 동티(흙이나 돌을 잘못 다루어 지신의 노여움을 사서 받는 재앙)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고사는 지방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주는 목욕재계하고 정성들여 제상을 준비한다.
제수로 쓰이는 물건으로는, 계란 1개를 땅에 묻고 그 위에 밥 한 그릇, 마른명태, 술 한 잔을 차려놓고 엎드려 절을 하며 개토를 선고한다.
그런 후 동서남북 사방으로 술을 한 잔씩 땅에 붓기도 하고 소금을 한줌씩 뿌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의식은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무사고를 기원하며 집에 불이 나지 않고 잡귀가 들지 못하게 부정을 치기 위함이다. 고사(텃제)를 마치면 곧바로 집터를 고르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때도 대주의 운세에 맞는 방향부터 땅 파기를 시작한다.

3. 정초
터다지기가 끝이 나면 지관(地官)이 정해 놓은 좌향에 따라 도편수(집을 짓는 총책임자로 목수의 우두머리다)는 기둥을 세울 자리에 주춧돌을 놓게 된다. 이때 지관은 패철을 놓아 기둥 중심선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고 그 위에 열십자(+)로 기둥의 중심축 자리를 표시한다.
이렇게 초석 놓을 자리를 정하게 되면 도편수는 규준틀을 세우고 실을 띄워 기둥 놓일 자리를 정하고 초석 중심에 먹을 놓아 십반을 그려놓는다.
이와 같이 기초를 만드는 건축적 행위는 집안에 새로운 성주신의 잉태(孕胎)를 위해 어머니를 상징하는 땅(穴)에 아버지의 씨앗(生命)을 의미하는 주추를 박아 성주신을 잉태하게 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4. 입주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입주라고 부른다. 기둥을 세운다는 것은 초석에 그려진 십반과 기둥 하부에 목수가 먹선 놓은 십반을 맞추어 세우는 일을 말하며 기둥이 수직으로 잘 세워졌는지 도편수는 사게부리(추)를 내려 다림을 보게 된다.
수평과 수직이 맞으면 기둥에 버팀 목을 대고 기둥머리에 창방을 연결하게 된다. 이렇게 작업이 진행되면 기둥머리에 보와 도리, 포작을 얹음으로서 건물의 구조틀이 만들어지게 된다.
입주 역시 지관으로부터 택일(擇日)을 하여 시행하는데 기둥을 세우는 과정은 수태(受胎)된 성주가 모태(母胎) 안에서 발육하여 뼈대를 갖추는 과정으로 정상적 골격을 갖춘 성주 출산을 위해서 기둥 수직 세우기는 매우 중요하다.
5. 상량제

기둥과 보가 얹히면 지붕틀을 꾸미게 되는데 지붕틀은 서까래를 얹을 수 있도록 짜여진 지붕구조를 말한다. 지붕틀을 마감하는 마지막 작업이 바로 종량 마룻대를 올리는 작업인데 이로써 구조체는 마무리되고, 다음부터는 벽을 치고 마루를 놓는 등의 내부 공사가 진행된다. 따라서 상량을 올리는 일은 큰 사고 없이 구조체 공역을 마침으로써 큰 고비를 넘겼다는 의미를 지니게 되므로 공사일정의 중요행사가 된다.
주인의 경제적 형편에 따라 떡 ? 과일 ? 술 등을 준비하고 돈이나 피륙도 갖추는데, 이날의 제물들은 목수가 모두 갖게 되므로 상량일을 목수의 생일이라고 한다. 상량식을 할 때 대목(목수)은 정시에 상량을 할 수 있도록 기둥위에 보와 도리를 얹은 후 대공을 세우고 마룻대를 미리 준비하여 의식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한다. 또한 대주가 성조운(成造運)이 들었는지를 알아보고,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가족 중에 운이 맞는 사람을 대주로 삼아 택일하여 상량 시(時)를 정해 의식을 행한다.
대주와 상량 일시가 정해지면 의식이 시작되고 상량문(上樑文)이 쓰인 마룻대를 상량할 위치에 놓고 그 앞에 제상을 차린다. 제상에는 돼지머리 또는 명태와 밥, 흰시루떡, 삼색 과일, 술, 돈 등의 제물(祭物)을 차려 놓고 향불을 피워 정해진 대주가 두 번씩 3회 절을 한다.
대주의 절이 끝나면 아들, 손자들도 차례대로 절을 올린 다음 부어 놓았던 술을 마룻대에 뿌리면서 자손대대로 무병장수하며 가정의 화목을 빈다. 절이 모두 끝나고 나면 돈과 광목, 명태, 실, 쌀(쌀은 종이봉지에 넣음)을 마룻대에 매어 상량을 한다.
상량 때 집주인의 성주(집을 지키고 보호한다는 조상신)를 모셔다 “대주가 새집을 지었으니 아무 탈 없이 집을 잘 지켜 달라”는 뜻으로 목수가 창호지를 접어서 기둥머리에 흰 실타래로 묶어 놓기도 한다. 상량의식이 모두 끝나고 나면 대주는 마을 주민들을 초청하여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목수는 상량일을 종도리 하단이나 보 바닥에 적어 넣는다. 경우에 다라서 상량문을 적어 부재사이에 껴 넣기도 한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한옥문화의 중요한 한 형태이며 역사의 기록이 된다.
이런 의식을 거쳐 지붕이 구성되는데 지붕의 짜임은 벽체나 바닥과 더불어 건축공간을 구성하고, 외부로부터 비 ? 눈 ? 이슬 등을 비롯해 온도 ? 습도 ? 음향 ? 일광 ? 바람 ? 시선 ? 외적 등을 차단하는 기능을 갖게 되므로 벽체와 같이 시각적으로도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 형상이나 마감재료가 건축물 외모에 큰 영향을 미침은 물론이고, 한옥의 처마구조는 한국 건축 특유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6. 입택(집들이)
집이 완성되었다면 손 없는 날을 길일로 정한 후 집들이를 한다. 각 지방 풍습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조왕솥(부엌에 있는 솥 중에서 주로 밥을 짓는 솥이다.
조왕이란 부엌을 맡은 신을 말하며 부엌의 모든 길흉을 관장한다)을 제일 먼저 가져간다. 이때 솥 안에 흰시루떡(백설기)을 만들어 넣어 옮기는 지방도 있고, 불씨가 담긴 화로를 넣어가는 지방도 있다.
새집에 이삿짐이 도착하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조왕솥을 내려놓고 고사(절)를 지낸다. 그 다음 입택 시간에 맞추어 솥을 부엌에 걸고 밥을 지어 조왕신께 고한 후 술과 음식을 마을 주민들에게 대접한다.
그리고 세간을 모두 집안으로 들여놓게 되면 제일먼저 조상을 모시는 의례를 행한다. 안방 북쪽 상인방 밑에 조상신을 좌정시킨 후 음식을 차려놓고 새집으로 이사 들었음을 알리며 가족들의 수복을 빈다. 다음으로 성주신과 잡신들에게도 집안의 안녕과 번성을 기원한다.
1) 기둥과 주두 2) 추녀걸기 3) 서까래 4) 서까래 걸기
5) 도리 얹기 6) 종도리 얹기 직전 7) 종도리 얹기 완료 8) 솟을 합장 완성
◈ 한옥의 재료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한옥과 흙
▶ 기와
기와는 개와(蓋瓦)라고도 하는데, 중국의 문헌인 "고사고(古史考)"에 "하(夏)나라때 곤오씨가 기와를 만들었다(夏時昆吾氏作瓦)"라는 옛 기록이 있고, 약 3천년 전 주나라때 사용된 기와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낙랑시대(樂浪時代)라 불리는 삼국시대 초기에 처음으로 건물에 사용되었다. 이때에는 평기와(平瓦) 처마에 아직 와당(瓦當 기와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이 발달되지 못하였으나, 중국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연화(蓮華)무늬의 원와당이 발달하였다.

삼국시대의 기와는 주로 육조시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고구려는 전통성을 살려 소용돌이꼴 무늬에 특색이 있는 다양성을 보였으나 백제에서는 간소한 연화무늬가 주류를 이루어 남조(南朝)의 강한 영향을 보이고 있다. 특히 고구려 ? 백제의 유적에서 평기와의 처마 끝에 지압(指壓)무늬(손끝으로 누른 무늬)가 발견된 것은 처마평기와(軒平瓦)가 와당으로 발전하는 원초적 형태다.

기와의 형태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암키와(평기와)와 수키와(둥근기와)인데, 일반적으로 지붕은 산자 위에 진흙을 이겨 얇게 편 다음, 위 ? 아래로 암키와를 걸치고 좌우의 이음매에 수키와를 덮는다. 그리고 처마 위에 물끊기로 막새를 붙이는데 암키와 끝의 것을 암막새, 수키와 끝의 것을 수막새라고 한다. 지붕마루는 기왓골에 맞추어 수키와를 옆으로 세워 막고, 그 위에 수키와를 한 줄로 세워 댄다. 전자를 착고(着高), 후자를 부고(付高)라 하며, 그 위에 마루장을 3∼7겹 덮고 최상부에 수마루장을 덮는다. 마루의 양 끝에는 용두 기와를 세워 장식을 겸한다.
▶ 전돌

전돌은 주로 벽돌무덤, 궁궐 및 사원 건축에 이용되었는데 그 종류나 쓰임새, 모양이 다양하다. 전돌은 용도에 따라 무덤 전돌과 탑 전돌 등으로 구분된다. 형태에 따라서는 방형 전돌, 삼각 전돌, 능형 전돌(陵形塼), 이형 전돌로 구분되고 문양의 유무에 따라 민무늬 전돌과 무늬 전돌로 나뉘기도 하며, 글씨가 새겨진 명문 전돌도 있다. 무덤 전돌은 고구려나 백제에서 확인되며, 공주의 송산리 6호분과 무령왕릉의 것이 대표적인데, 부여 정동리 가마터유적에서 발견된 연꽃무늬와 글씨가 있는 전돌은 무령왕릉에 쓰인 전돌들과 비슷하여 주목된다.

무늬 전돌은 부여 외리 유적에서 출토된 8종의 무늬 전돌이 대표적인 예로서 산경(山景)무늬, 귀형(鬼形)무늬, 반용(蟠龍)무늬, 봉황무늬, 연화와운(蓮花渦雲) 무늬 등이 출토되었다. 이 전돌들은 조각 수법이 매우 세련되었고, 화려한 의장(意匠)을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군수리 절터에서 출토된 상자모양 전돌이 있다. 이러한 무늬 전돌은 6∼7세기에 제작된 것이 많으며, 백제미술의 부드러움이나 세련됨을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

2. 한옥과 소나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모두 주고 가는 소나무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는 적송(赤松)아러 뷸리기도 하는데, 이는 소나무의 껍질이 붉고 가지 끝에 있는 눈의 색깔도 붉기 때문이다.

소나무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중생대의 삼첩기 말기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1억 7천만 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나무의 솔은 상(上). 고(高). 원(元)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무 중의 '우두머리' 라는 뜻이다.

소나무는 한민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의식주의 모든 생활에서 소나무는 아주 중요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나무와 인연을 맺는다. 소나무로 기둥을 만들고 대들보를 올린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쳐서 나쁜 기운이 들어오는 걸 막는다. 산모는 소나무 장작불로 지은 밥과 미역국을 먹고 그 불로 따뜻해진 온돌방에서 조리를 했다.

송판(松板)으로는 가구를 만들었으며 솔가리는 불쏘시개로 썼다. 음식에도 소나무는 빠질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식재료다. 한민족은 솔잎으로 만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를 담아 마시기도 했고 꽃가루로 송화주(松花酒)를 빚고, 새순을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를 즐겼다. 구황이 들 때는 소나무 속껍질 인 송기(松肌)를 벗겨 떡도 만들고 죽을 쑤어 먹기도 했고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어 먹었으며, 솔잎으로 차를 다려 마시기도 했다.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고 송이버섯은 최고의 음식으로 친다.

소나무 껍질에 홈을 파서 송진을 모아썼고, 소나무 뿌리를 건류(乾溜)하여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으며,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송연(松烟)으로 먹(墨)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여승들은 소나무 겨우살이로 만든 송낙(松蘿)을 쓰고 다녔으며, 양반들은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산림처사들은 송도(松濤)와 송운(松韻), 즉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다. 소나무의 푸른 빛깔인 송취(松翠)와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던 선비가 한둘이었을까. 생을 마친 뒤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갈 때까지, 한민족은 태어나서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던 것이다.

한민족과 깊은 인연을 지닌 소나무는 민족의 정서와 기질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건축분야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소나무는, 오두막이든 초가삼간이든 솟을대문 세도가의 아흔아홉 칸 저택이든, 구중궁궐 크고 작은 권부의 대궐이든, 건축재로서의 국가 존립의 한 기틀을 형성했다.

특히 궁궐을 지을 때는 오직 소나무를 사용했다. 이는 나무결이 곱고 나이테 사이 폭이 좁으며 강도가 크고 잘 뒤틀리지 않으면서도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딜 뿐만 아니라, 진이 빠지더라도 나무가 견고해져 마른 후에도 갈라지지 않는, 목재중의 목재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 한옥의 구조와 기능 - 한스타일에서 발췌

1. 안채와 안방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된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이었다. 안채는 위치상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 외에는 남성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들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들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 가구 등이 놓여 있었다.
2. 사랑채와 사랑방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는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방으로 남자들의 공간이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며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과 가까운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남자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이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 외에도 독서, 예술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이었으며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던 조선시대에는 사랑방문화 또한 발달하였다.

또한 금욕적 유교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 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장농과 책장, 문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다.

3. 사당채와 사당

조선시대에는 조상숭배의식의 정착과 함께 중상류의 주택에는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시고 각 위마다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존위(最尊位 가장 높은 조상) 앞에 놓았다.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들은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다.

4. 행랑채
한옥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의 격을 지어 배치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의 경우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 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 행랑채를 따로 마련하였으며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행랑채와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하였다.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中)의 공간으로 중간계충인 청지기가 거처하였다.

행랑이란 대문 양쪽 또는 문간 옆에 있는 방을 말한다. 집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큰집에서는 행랑채를 길게 짓고 방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원래 이를 행랑이라 한다. 행랑에는 대개 노비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이들은 행랑아범, 행랑어멈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행랑을 창고로 쓰이기도 하였다.
5. 별당채

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는 별당이 집의 뒤, 안채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었다. 결혼 전의 딸들이 기거하는 별당은 초당으로 불리었으며 또한 결혼 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다.

6. 곳간채

곳간채는 오래 저장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였던 창고이다. 중상류층의 주택 중에서도 부유한 집안은 수십 칸 규모의 주택에서 살았으며 이들 칸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곳간채가 별도로 마련되었다.

7. 대청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 앞의 너른 마루를 대청이라 한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한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놓으면 대청은 열린 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分閤門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 열 수 있게 만든 큰 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에 있는 것을 안대청이라 하며 사랑채에 면해있으면 사랑대청이라 한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있어 엄밀히 말하면 실내라고 할 수 없다.

대청 중앙에 떡 버티고 서서 아랫사람에게 분부를 하는사람의 위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대청은 웅장감을 강조하였다.

대청의 바닥은 상류주택에서 서민주택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우물마루가 쓰였다. 대청의 구조를 보면, 마당에서 대청으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다. 댓돌에서 바로 올라서면 대청 앞쪽으로는 대개 앞 툇마루가 있다. 대청의 크기에 따라 기둥의 수가 다른데 보통 대청의 크기는 2칸에서 8칸까지 다양하다. 주로 사랑채에 설치되었던 누마루는 기단 없이 기둥위에 설치된 형태로 원두막처럼 마룻바닥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사방이 트인 노출공간이다. 누마루는 대청처럼 여름에는 문을 걸어 올려 주변의 자연의 운치를 즐기는 공간으로 사용했으며 겨울철에는 문을 닫아 한기를 막았다.
8. 부엌
불을 지펴서 각종 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며,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 하여 별채를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다. 부엌 바닥은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cm 정도 낮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들이도록 설계된 '온돌구조' 때문이다. 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 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두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 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다.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었으며 건넌방 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부엌에서 밥을 풀 때 오른손에 주걱을 들고 왼손에 밥그릇을 들고 푸는 것이 보통이다. 이때 동향대문이면 밥을 안으로 푸는 격이어서 좋으나 혹 부엌 위치가 나쁘거나 대문 위치가 나쁘면 밥을 대문 밖을 향하여 푸는 격이 되어 살림이 헤퍼 망한다고 했다.

부엌살림은 안방마님의 감독 하에 있고 큰살림인 경우는 가사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킨다. 부엌에서 물일과 밥짓기, 국수 삶기, 국 끓이기 등을 도맡아 하는 사람을 반모(飯母)라 했고, 밥데기 혹은 부엌데기라고도 불렀으며 지금으로 치자면 조리사라 할 수 있다. 또 찬간에서 찬물(饌物 반찬)을 만드는 사람을 찬모(饌母)라 하였다.

궁중의 안소주방(內燒廚房 왕과 왕비의 조석 수라상을 관장하는 곳)에서 보면, 찬모는 주방 상궁의 격이고 반모는 무수리의 격에 해당된다. 그 밖에 가사에 관한 다른 잡일을 하는 사람을 안잠자기 ? 또는 상직꾼(常直軍)이라 하였다.

매일 뒤주에서 밥쌀을 내 주는 사람은 안방 시어머니이고 며느리는 쌀을 받아 반모에게 넘기고 밥을 풀 때까지 모든 것을 관장한다. 며느리는 쌀을 씻어 솥에 안치는 것을 보고 찬간의 음식을 감선(監膳)한다. 모든 식구들의 밥그릇이 준비되면 며느리가 어른의 진지부터 지어 놓은 밥을 식성에 맞게 푼다. 원 가족의 밥을 푸고 나면 주걱을 반모에게 넘겨 다른 식솔 일꾼들의 밥을 푸게 한다.
9. 찬방
찬방 혹은 찬마루라고 불리는 공간은 오늘날 주택의 부엌방과 다용도실 정도에 해당하는 곳으로 반가나 중 . 상류 지방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엌과 인접한 공간이다. 찬마루는 부엌과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이곳에서 상에 올려 안방, 사랑방 등으로 내갔으며 간단한 음식은 이곳에서 조리하였다. 이곳에는 상을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 식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도 쓰였다. 불을 지펴서 각종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나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 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10. 장독대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의 자연환경은 음식이 잘 부패하는 조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음식을 보관할 때 발효시키는 방법이 일찍부터 개발되었고, 젓갈류를 비롯한 발효음식이 매우 잘 발달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추장, 된장, 간장, 김치, 젓갈류 등을 보관할 장독대는 실생활과 어울려 중요한 요소였다.

발효음식은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되는 양지바른 곳에 두었는데, 통풍을 위해서 장독대는 지표에서 일정한 높이에 두었다. 또한 장독 하나하나에 돌로 동아리를 해서 받치기도 하였다.

장독은 조리를 하는 부엌이나 우물과도 가까워야하기 때문에 대부분 반빗간 뒤에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장독대는 한국 가정의 필수적 설비로서 대체로 햇볕이 잘 드는 동편에 마련하는데, 대지가 넓은 집은 뒷마당에 만들고, 좁은 집에서는 앞마당에 만든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안채로 반빗간이 합쳐짐에 따라서 안채 부엌과 가까운 곳에 장독을 설치하였는데, 주로 안채의 후원이나 옆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장독은 음식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정한수를 떠 놓고 소원을 비는 곳이기도 하여서 정신적인 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11. 우물

살림집에서 물은 필수적이므로 우물을 통해 얻는 지하수맥은 상당히 중히 여겼다. 우물은 삼국시대 이미 집집마다 있었다. 井자형 방틀을 짜고 물을 들어 올리는 도르레를 설치한 우물 옆에는 물확(돌로 만든 수조)과 연결 수조가 있어서 부엌이나 방앗간에 물길이 닿도록 하기도 한다.
우물은 물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냉장고의 역할도 했다. 빙고가 시설되지 않는 일반 민가에서는 여름에 과일이나 음식을 우물에 끈을 매 보관했다가 먹기도 했다
12. 뒷간

지방에서는 잿간에 변소를 마련하는 경우가 있다. 부춧돌 두 개를 놓고 한쪽 벽에는 주걱처럼 생긴 부삽이나 고무레(실을 뽑아내는 틀)가 놓여 있다. 용변을 보기 전에 뒤쪽의 재를 일정량 부춧돌 사이에 끌어다 놓는다. 그리고 용변을 본 후에는 주걱을 이용하여 재에 말아 한쪽에 치워뒀다가 거름으로 이용한다. 재는 탈취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요즘 수세식보다 냄새가 나지 않는다. 또 거름으로 활용하니 일석이조다. 화장실을 잿간 위에 높게 설치하는 경우도 있다.

▣ 21세기 새로운 한옥 - 천년한옥에서 발췌
▶ 전통한옥의 문제점 및 가능성

근대화 과정에서 한옥의 맥은 거의 단절되었고 그 기간 또한 짧지 않았다. 근대화가 한옥을 비켜나지 않았다. 즉, 지속가능한 우리의 주거문화로 정착하는데 실패했다. 도시의 아파트, 농어촌의 벽돌조 슬라브 주택이 우리 주거문화의 대명사가 된 지도 어느덧 30~40여년이 됐다. 그나마 한옥의 개념을 어느 정도 품고 있었던 농어촌의 경사지붕 목조주택도 하나둘씩 없어지고 있다. 다시금 한옥을 우리 주거문화로 되살려 놓을 수 없을까? 한옥이 농어촌에서 까지도 우리 주거문화로 계승 발전 되지 못한 것은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러 이유 중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든다면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한옥 = 불편
한옥 = 춥다
한옥 = 비싸다

첫째, 불편함이란 동선(이동경로)이 현대생활에 전혀 맞지 않고 턱(바닥차)이 많다. 부엌도 불편하고 또한 화장실도 바깥에 있어 더욱 그렇다.
둘째, 춥다는 것은 한옥의 벽이 두껍지 않고 틈새가 많아 단열이 안되어 겨울을 지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아궁이에 의한 온돌난방도 역시 한계가 있다.
셋째, 비싸다는 것은 한옥의 주 구조(뼈대) 재료가 목재이기 때문에 목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재료, 시공 등)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기 때문이다. 또한 소위 목수라는 기술자를 구하기도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이상의 문제만 어느정도 해결된다면 한옥의 재정착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가능성 방안으로는
? 건축비 절감을 위해 재료의 규격화, 설계의 표준화, 시공의 합리화가 필요하다.
?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현대주택의 평면 설계개념을 과감히 도입해야 한다. 즉, 한옥의 외형을 살리면서 오늘에 사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게 평면개발이 이루어져야 한다.
? 한옥에 맞는 새로운 설비 및 재료개발이 필요(구들,기와,벽돌 등)
?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는데 한옥이 너무 진화하면 한옥이 갖는 정체성이 없어질 수 있으니 설계에 각별한 신경이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한옥은 천연재료를 사용하는 건강주택이다. 최근 유기농 산업이 호황을 누리는 시대에 한옥이야 말로 최고의 웰빙, 바이오 주택이 될 것이다.
? 건축한옥사례
? 나주 홍기응 가옥 안채
? 1892년 건립
? 면적 : 86.03㎡ (26평)
? 대청과 안방(방2) 위주의 건축
? 전면과 우측의 툇마루가 집에서 큰 비중을 차지
원고출처 : 목포대학교 김지민(천년한옥자문위원회)
▣ 한옥의 역사 - 천년한옥에서 발췌
▶ 한옥의 개념

? 한옥(韓屋)이란 선사시대부터 이땅에 우리민족 고유의 기술로 지은 건축을 의미한다. 즉, 현대건축과 상반되는 개념의 용어이다. 우리는 한옥을 전통건축 또는 고건축(古建築)으로도 부른다. 한편 언제부터인가 한옥이 단순히 살림집으로만 한정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좁은 의미의 용어로 본래는 전통건축의 개념과 같은 한국의 전통집을 일컫는다.
? 그러나 최근에 들어 ‘한옥’이란 용어가 점차 ‘살림집’건축으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다. 근래에 출간된 많은 한옥관련 서적이 모두 주택개념으로 한옥이 소개되고 있고 매스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아마 우리의 전통집이 21세기에도 지속가능한 공간으로 활용 될 수 있는 것은 주택이 제일 우선순위에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옥을 꼭 살림집으로 영역을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그 쓰임새는 개발여부에 따라 무척 넓을 수 있다.
▶ 한옥의 시작, 움집

? 한반도에는 개략 기원전 60만년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사람들이 동굴이나 야외에 임시 장치물 등을 설치하고 살았다.
? 제대로 집의 형태를 갖춘, 즉 한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집은 개략 기원전 6,000년경(신석기 시대 전기)부터 지어졌다. 이 시기에는 인간이 한곳에 오랫동안 머무는 집단생활을 영위하였는데 오늘날로 보면 마을의 출현을 의미한다.
? 이시기에 지어진 집을 움집, 또는 수혈주거(竪穴住居)라고 한다. 집의 형태는 원형둘레에 통나무를 비스듬히 세워 중앙 한곳으로 모은 원추형으로 외부에는 나뭇가지나 풀 등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평면은 직경이 5m내외이고 집 바닥은 지반면과 같게 한것이 아니고 0.5~1.0m정도 낮게 했다. 집 내부에는 불을 피우는 화덕이 있고 곡식 등을 저장하는 원추형 토기 등을 바닥에 묻어두기도 했다.
? 움집의 평면형은 초기에는 원형이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옆으로 긴 네모진 방형으로 변했다. 방형구조는 원형보다 공간적으로 더 쓸모가 있고 또한 기둥을 일렬로 배열할 수 있어 구조적으로도 안정이 된다. 즉 방형 평면이 원형보다 한층 진보한 구조이다.
4세기경의 주거지로 여겨지는 전남 함평 중랑유적지는 100여호가 넘는 대단위의 집단 취락지로 그 규모에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주거 형태는 움집으로서 평면형은 주로 방형이다. 이 시기는 삼국시대가 시작된 시기인데 아직까지 지방 서민의 주거형태는 움집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00여호가 집단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은 완벽한 커뮤니티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 한옥의 발전

? 선사시대를 지나 기원1세기경부터는 한반도에 강력한 왕권국가인 고구려(BC36 ~ AD668) 를 시작으로 백제, 신라 등 고대국가가 등장한다.
? 고대국가의 출현으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비롯하여 다양한 유형의 건축물이 한반도에 지어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이후의 기록인 구당서(舊唐書)에 따르면 “산곡을 따라 집을 지었는데 일반백성들의 집은 초가였고 절과 신당, 왕궁, 관아들은 기와지붕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한편 종교 역시 전통건축의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4세기부터 한반도에 전파된 불교는 현재까지도 수많은 사찰이 융성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1500년 이상을 지켜오고 있다. 현재에도 전국의 많은 사찰에서는 과거에 없어졌던 건물을 복원개념으로 새로 짓거나 아니면 개량한옥식으로 현대적 사찰 건물을 건립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불교보다는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하면서 이와 관련된 종묘, 성균관과 향교, 서원, 재각 등 유교관련 건축물들이 전국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 시대별 전통건축의 형성
시대
역사 및 사회적 배경
주요건축
전국
전남
선사시대
신석기, 청동기 시대 등 원시
공동체 생활
서울암사동 선사주거지,
여주 흔암리 주거지, 강화 고인돌
화순·장흥 고인돌, 영암 장천리
주거지, 승주 대곡리 유적
삼국 및
통일
신라시대
고구려(372), 백제(384),
신라(527)의 불교도입
,
왕족 중심의 귀족사회
,
삼국통일(668)
익산 미륵사(601년경),
경주 황룡사
(553),
불국사와석굴암
(8C),
평양 안학궁(427년경
),
부석사(7C), 감은사(682)
화엄사(554), 송광사(신라말),
선암사(신라말), 미황사(749)
고려시대
불교 절대적 신봉(11,12C),
수도이전(개경
),
무인집권(12C)
수덕사 대웅전(1308),
부석사 무량수전(고려말
),
봉정사 극락전(고려말
),
강릉 객사문(고려말)
운주사 석탑(중기 이후)
조선시대
조선개국(1392),
수도이전(1394, 한양
),
유교가 국가 통치이념
,
중앙집권강화
,
임진왜란
(1592),
신분제의 와해와

신흥부유층 성장(조선후기),
개항(1876)과 함께 서양건축 유입
종묘(1395),
경복궁
(1395),
숭례문(1448,재건
),
도산서원
(1574),
병산서원
(1613),
양동마을 (조선중
),
하회마을 (조선중
),
수원화성(18C
),
명동성당(1899)
무위사 극락전 (1430),
송광사 국사전 (조선초
),
도갑사 해탈문
(1473),
소쇄원(1530년경), 녹우(15C
),
필암서원
(1590),
화엄사 각황전
(1702),
위계환 가옥(1775), 운조루
(1776),
나주향교 대성전 (조선초
),
홍기응 가옥
(1892),
이금재 가옥(1900년경
),
목포 구 일본영사관(1900)

원고출처 : 목표대학교 김지민(천년한옥자문위원회)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룬 전통건축 기술
한국 전통건축의 구성요소
건축은 그 단일의 개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을 이루는 외부공간과 자연환경과의 관계로 이루어지며, 이들이 어느 곳에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상황이 결정된다. 따라서 편의상 이를 구분하기 위하여 건물을 직접적으로 이루는 요소들을 내부공간 구성요소, 건물 밖의 주변 요소들을 외부공간 구성요소라고 구분할 수 있겠다.
내부공간 구성요소는 건물의 구체적인 의장요소들로 배치와 평면, 기단, 초석, 기둥, 가구, 벽체와 창호, 공포대, 지붕, 바닥, 천장 등이고 외부공간 구성요소는 건물 밖의 난간, 대문, 굴뚝, 석물, 샘터와 도랑,
석루조, 다리, 연못과 정자, 석단, 화단, 석계, 징검돌과 돌길, 식재, 마당, 담장, 색채 등이다. 이들에 관하여는 통시적으로 시간의 추이에 따라 변화가 있으며 시대적 편년이 이루어지나 아래에서는 공시적인 입
장에서 구성요소들을 설명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 배치와 평면

집터 위에 집을 앉히는 방법을 배치라 하며 이는 좌향과 관계가 깊다. 좌향은 건축물이 어떤 집터에 앉음으로써 좌가 생기고 그 건축물이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향이 결정된다. 좌향의 개념이 언제부터 이루어졌는지 몰라도 아마 풍수지리설이 삼국시대에 이미 도입되었고, 고려에 서는 개국 초부터 도읍의 선정, 궁절의 건축 등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 전부터라 생각된다.
사찰의 배치에서는 대부분 축이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축을 중심으로 해서 일주문, 사천왕문, 문루, 중정, 금당 등의 순으로 배치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러나 축이 설정된다고 하여 반드시 좌우가 대칭인 것은 아니다.
한국의 전통건축에 있어서 평면의 모양은 크게 각형평면과 원형평면, 이형평면으로 나누어지며 또 각형평면은 정방형, 장방형, 육각형, 팔각형, 십자형 등으로 세분된다. 원형평면은 특수한 것으로 목조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석굴암본실의 평면에서 나타난다. 이형평면으로서는 선형평면이 있는바 창덕궁 금원의 관람정평면이 이에 해당된다.

(2) 기단

기단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모든 건축에 필수적으로 형성되어 왔다. 기단을 분류하여 보면 첫째, 단을 쌓는 재료에 따라 토단, 전축기단, 석축기단으로 분류되며 둘째, 단의 수에 따라 단층기단, 다층기단으로 나뉜다. 셋째, 마감 석재의 형태와 층의 형태에 따라 막돌허튼층쌓기, 막돌바른층쌓기, 다듬돌허튼층쌓기, 다듬돌바른층쌓기 등으로 분류되며, 넷째 쌓는 방법에 따라 적석식기단, 가구식기단으로 분류된다.
(3) 초석

초석은 기둥에 전달되는 하중을 받아 이를 다시 기단을 통하여 지반에 전달시키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먼저 재료의 가공여부에 따라 막돌초석과 다듬돌 초석으로 크게 분류된다. 다듬돌 초석은 자연에서 채취한 막돌을 가공하여 지상에 노출되는 부분을 정교하게 잘 다듬은 것을 말하며 지면에 노출되는 부분의 가공 수법에 따라 원형초석, 방형초석, 팔각형초석, 원주형초석으로 나눈다.

(4) 기둥

기둥은 구조적으로 지붕의 하중을 받아 그 하중을 초석에 전달하며, 실제적으로 공간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가 된다. 또 의장적으로 입면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주고는 건물의 높이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입면의 주간 거리와 함께 입면의 크기를 형성하는 요소가 된다. 기둥을 단면에 따라 분류하면 원주, 방주, 육각주, 팔각주의 4종으로 나뉘며, 이중 방주, 육각주, 팔각주는 원주에 대립되는 각주에 속한다. 또 기둥의 전체형태에 따라 배흘림 기둥, 민흘림 기둥, 원통형 기둥의 셋으로 구분된다. 배흘림 기둥은 기둥중간부분이 약간 배불린 모습을 말하고, 민흘림 기둥은 기둥윗부분이 좁고 아랫부분이 넓은모습의 기둥으로 안정감을 주는 기둥이며, 한국건축에서는 입면의 양끝 기둥을 우주라고 하는데, 일반 평주보다 약간 높게 치솟음을 두고처마선과 용마루선의 조화를 이뤄 안정된 입면을 형성한다. 또한 우주를 안으로 조금 쏠리게 세워 건물이 좌우로 쓰러지게 보일 것을 미리 교정하였다.

(5) 가구

한국건축은 목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가구식건축이다. 즉 기둥과 도리, 보로써 뼈대를 구성하고 그 위에 공포나 대공을 얹어 서까래를 받는 기본틀을 형성하고 여기에 합장, 장혀, 뜬창방, 초공 등이 부가된다. 가구의 기본은 삼량이며 구조물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사량, 오량, 칠량, 구량, 십일량으로 분류된다. 보에는 대들보, 중종보, 종보, 퇴량, 충량, 우미량, 귓보, 맞보 등이 있다. 도리에도 주심도리, 외목
도리, 내목도리, 중도리, 종도리, 하중도리, 상중도리로 세분된다. 대공은 동자대공, 판대공, 피연대공, 포대공으로 분리되며 합장은 종보위에 얹혀서 종도리를 양측에서 잡아 매어 주는 역할을 하는 부재이고
, 장혀는 도리 밑에 붙은 장방형 단면 부재로서 도리를 떠 받쳐주는 보조재로 통장혀와 단장혀로 대별된다. 뜬장방은 가구를 좀더 보강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기둥과 기둥사이를 연결하나 보모양으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공은 굴도리가 구르지 않게 해주는 부재로 주로 초각을 하였다.

(6) 벽체와 창호

한국건축은 입면 의장에 있어서 정면의 거의 전부를 벽체 대신 창호로 구성하고 벽체를 형성하는 부위는 측면과 배면이 된다. 먼저 벽체 양식은 모두가 심벽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입면 형태는 동일하다. 즉 기둥과 기둥사이에 인방을 상, 하 또는 상, 중, 하로 보내고 여기에 중깃과 가시새를 수직, 수평으로 설치하고, 여기에 다시 설외와 눌외를 엮은 후 흙을 바르고 석회로 마감하기 때문에 입면상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매끈한 벽체가 된다.

한국건축의 창호는 창과 문이 기능적으로 완전히 분류되어 있지 않고 그 한계가 모호할 때가 많기 때문에 형태 분류상 다음 네 가지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호로서만 사용되는 것으로는 판장문, 골판문, 맹장자, 도듬문, 불발기로 나눠지며 둘째, 창으로만 사용되는 것으로는 살창, 교창으로 분류되며 세째, 창과 호로 혼용되는 것으로는 띠살창, 띠살문, 용자창, 아자창, 만자창, 정자창, 숫대살창, 빗살창, 소슬빗살창, 귀자창, 귀갑창, 꽃살창 등으로 분류되며 네째, 하나의 창호 속에 여러종류의 창호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있다.

(7) 공포대
한국건축에 있어서 공포가 차지하는 시각적 비중은 매우 크며 지붕이 무겁게 건축의 몸체를 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을 분류하면, 주심포 양식, 다포양식, 익공양식으로 분류된다. 주심포양식은 공포의 짜임이 기둥 위에만 놓이는 것이고, 배흘림 기둥과 함께 외 2출목 정도로 간결하고, 제공끝의 쇠서가 강직하며, 대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어 입면상으로 강한 구조미를 나타내고 있다.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에 단부가 수직으로 끊기고 저면에 쌍s자곡이 있는 첨차를 얹고, 그 의에 다시 주두와 같은 모양으로된 소로를 얹어 대첨차를 받는다. 주심포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은 부석사 무량수전과 봉정사 극락전을 들 수 있다. 다포양식은 기둥사이에 공포대가 한 개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출목수가 증가하고, 쇠서가 연꽃이나 당초 등으로 화려하게 조각되거나 섬약해진다. 또 기둥과 외출목도리 사이가 넓어 지붕의 처마는 들려 보이게 되고, 입면상 공포대가 모두 노출되어 지붕과 벽체, 기둥과의 완충지대를 이루게 되며 처마 깊이는 점차 길어지면서 가벼운 맛을 내게 된다. 우주에 오는 귀포는 강한 대칭성 균형미를 이루게 되며, 기둥 사이에도 공포가 짜여지고 측면, 배면에도 모두 공포가 짜여지게 되므로 지붕처마의 서까래가 리드미컬하게 사면으로 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이 돌아 연속성을 주면서 시각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보의 형태는 장방형이고, 천장은 우물천장이며, 동자주와 대공에 장식이 약화되었고, 지붕은 주로 팔작지붕이었다. 끝으로 익공양식은 기둥위에 공포가 없고, 화반이 나타나며, 쇠서가 1개 있는 초익공, 두 개 있는 이익공, 3개 있으면 삼익공으로 나뉘고, 쇠서가 한개도 없는 몰익공도 있다. 익공계 건축은 건물자체가 그렇게 장려하지 않기 때문에 다포계 건축에서처럼 강한 시각적 요소가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주로 조선시대 후기에 나타나며 팔작지붕이기 때문에 우주에서도 양면성을 갖는 것이 주심포와 다른 특징이다.

(8) 지붕

지붕은 원시 수혈 주거 형식으로 벽체보다 먼저 발생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지붕을 분류해 보면 첫째, 맞배지붕은 양끝이 조금씩 치켜 올라가고 용마루선 역시 중앙부를 쳐지게 하여 서로 어울리게 하고 있다. 또 측면이 노출되기 때문에 구조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아름다운 구조미를 이루고 있다. 둘째, 팔작지붕은 궁궐, 사찰, 관아, 향교, 중상류 주택의 몸채 건물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지붕 형태로 네 귀의 처마끝이 치솟기 때문에 독특한 형태미를 이루고 후림과 조로는 착시현상을 교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셋째, 우진각지붕은 용마루를 형성하면서 사면으로 지붕골을 형성하는 형태로 도성의 성문, 궁궐의 대문, 일부 사찰, 작은 규모로는 상류 주택의 일각대문에서 사용되었다. 넷째, 다각형지붕은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이 있는데 대개 정자건축에 가장 널리 쓰인다. 특히 궁궐의 전각, 도성의 성문, 궁궐의 대문 등에는 추녀마루에 잡상을 얹고 용마루 끝과 합각머리에는 용두나 취두를 놓는다.

(9) 바닥

한국 건축의 바닥은 크게 전바닥, 마루바닥, 온돌바닥, 흙바닥으로 구별된다. 전바닥의 역사는 오래된것 같고 주로 삼국 시대때 많이 사용하였으며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는 전 바닥은 궁궐 건축의 정전과 같은 전각에 국한된다. 마루가 한국 건축에 나타난 것은 부족구가 시대의 원시적 주거에서라고 생각되나 주로 건축의 바닥으로서 설치된 때는 조선 시대이며 우물마루가 설치된다. 온돌 구조는 고구려 시대부터 사용되어 온 것으로 판단되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일반적인 바닥 구조가 되었다. 끝으로 흙바닥은 가장 원시적인 것으로 일반 주택의 광, 부엌바닥과 대문, 궁궐, 사찰의 회랑바닥으로 쓰인다.

(10) 천장

한국건축에 있어서 중요한 내부 시각적 요소로서 천장양식을 보면 연등천장, 우물천장, 보개천장, 귀접이천장, 빗천장 등을 들 수 있다. 연등천장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양식으로 서까래가 노출되고 서까래 사이에 흰 회를 바르기 때문에 가장 구조미가 잘 나타나는 천장이며 , 주로 초기의 주심포 건축과 초기의 다포계 건축에서 쓰이게 되었다.
우물천장은 내출목 수가 증가하고, 보 사이가 넓어지며 도리 수가 증가함으로써 내주의 주고가 높아 필연적으로 천장을 가설할 필요를 느껴 측간에서는 대량의 높이로 일부 천장을 가설하고, 다시 중량의 높이에서 단을 지어 일부 높여 천장을 가설하되 수평면상으로 가설되는 것이 아니라 높이를 달리하여 가설된다. 층단천장은 천장이 몇 단으로 나누어 종량과 중량의 높이로 일부 우물천장이 가설되어 지는데 이렇게 단이 진 천장을 말한다. 보개천장은 왕궁의 정전에서 우물천장의 일부를 좀 더 깊게 하여 꾸미거나, 또 사찰에서 불상의 상부천장 일부를 좀 더 깊게 꾸미는 것이다. 귀접이천장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오랜 양식으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혀 들어가기 상당히 오랜 양식으로 상부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혀 들어가기 위해 45°방향으로 판석을 내밀어 귀를 접게 된 것이다. 끝으로 빗천장은 천장면을 경사지게 처리한 양식으로 단독으로 설치되지 않고 수평으로 처리된 우물천장과 혼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상의 천장이외에도 내출목사이의 노출되는 부분을 가려서 시각적으로 차단하고 흙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의한 순각천장과 종이를 사용하는 종이반자가 있다.

내부공간 구성요소

(1) 난간

한국건축에서 난간이 건축되는 건물은 루나 정자에 국한되고, 사람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야 할 건축 양식이 별로 많지 않기 때문에 난간을 주로 외부 공간에 가설하여 외부적으로 중요한 의장요소가 된다.
난간을 구성 재료에 따라 분류하면 목조난간, 석조난간, 철조난간으로 분류되며 목조난간이 가장 보편적이고 루, 정자, 주택의 툇마루 등 목조 건축에 설치된다. 또한 의장적 수법으로 분류하면 평난간과 계자난간으로 나누어진다. 석조난간은 석계난간과 석교난간으로 나누어 분류된다.

(2) 대문

한국건축에서 대문의 의장은 주택에 있어서는 계급에 따라 양식을 달리하고, 크게는 건축물의 종류에 따라 딸라짐을 알 수 있다. 대문의 종류를 분류하여 보면, 삽작문과 바자문, 평대문, 솟을대문, 일각대문으로 분류되며, 삽작문과 바자문은 보통 농가나 초가에 설치되는 문으로 설치된 담장과 대부분 같은 구성재로 되어진다. 평대문은 기와 지붕을 한 일반 서민주택이나 중류주택에서 몸채 또는 행랑채와 같은 지붕 속에 문을 설치한 양식이다. 솟을대문은 대문이 설치되는 행랑채보다 한층 높게 지붕을 솟게 한 것으로 가마를 타고 바로 들어갈 수 있게 한 것이다. 일각대문은 주로 이 마당과 저 마당을 구획하는 담장에 설치된 대문이다.

(3) 굴뚝

굴뚝은 온돌구조와 함께 발달 했으리라 짐작되며, 각종 굴뚝을 분류하여 보면, 그 양식상 간이형, 독립형, 복합형으로 나누어 지고 굴뚝의 의장상으로 분류하면, 흙+막돌쌓기, 검은벽돌+기와+연가, 붉은 벽돌+기와+연가, 흙+기와편+돌+기와지붕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굴뚝은 구성재를 주 건축의 구성 재료와 동질의 것을 사용함으로써 통일성을 가져오고, 굴뚝에 이용된 장식적 무늬는 바로 담장이나 합각부 등에 다시 반복됨으로써 쉽게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 석물

외부 의장적 요소로서 석물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물확은 돌확이라고도 하며 과히 크지 않는 돌덩이를 조금 가공하여 그 중앙에 큰 홈을 파서 물을 담아 마당에 두는 석물이다. 때로는 돌절구로도 쓰인다. 둘째, 석련지는 석지라고도 하는데 대개 직육면체(평면은 대개 장방형)의 돌을 파서 물을 담고 때로는 연꽃을 키우는 석물이다. 셋째, 석조는 석수조라고도 하며 사찰의 승방이나 주택의 우물가에 배치된 커다란 물통이다. 넷째, 석함은 괴석대라고도 하며 괴석을 담아 마당에 늘어놓은 석물을 말한다. 다섯째, 대석은 화초분이나 등불, 또는 석함을 받치는 석물로서 방형, 다각형, 원형, 특수형 등 다양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 여섯째, 식석은 커다란 돌덩이의 돌을 직육면체 등으로 깎고, 그 면에 무늬를 조각하여 뜰에 놓고 완상하는 것이다. 일곱째, 석상은 커다란 자연형태의 반석, 또는 큰 돌을 판석으로 가공하여 뜰에 괴어 놓은 것으로 걸터앉거나 차를 끓이는데 이용되는 석물이다. 여덟째로 노둣돌은 하마석이라고도 부르는데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이용되는 디딤돌을 말한다.

(5) 샘터

샘터나 우물은 생활용수를 공급해 주며, 연못에 물을 채워 주고, 또 화재에 대비하여 방화용수를 공급해 준다. 주로 원형과 방형의 물확을 만들어 극심한 대조를 이루게 하여 통일성 있는 변화를 나타낸 특출한 의장이

(6) 도랑

외부공간에 있어 도랑이나 개천은 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나 빗물을 모아 연못이나 또는 집터 밖으로 흘러 보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요소로서, 디자인 요소 중 방향성을 갖게 됨으로 정적인 공간에 동적인 시각요소가 된다.

(7) 다리

다리는 목교와 석교로 크게 나누어지며 궁궐건축이나 상류주택에서는 돌다리가 널리 축조된다.

(8) 석루조

도랑에서 물이 흘러들고, 흘러 나가는 곳에, 또 담장안의 빗물을 담장 밖의 도랑으로 내보내는 곳에는 석루조를 둔다.

(9) 석단, 화계, 석계

석단은 집터의 높고 낮음이 다른 여러 단을 형성하게 되고, 이들 단의 가장자리는 돌로서 마무리함으로써 건축되는 필수적인 의장요소이다. 석단은 막돌로 마무리하거나 다듬은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 하며, 주택이나 사찰, 궁궐 등의 뜰에서 마당의 일부와 일부 사이에 높낮이를 두기 위해 만들기도 하고, 또 정심수, 석함들을 늘어놓는 곳 주위에 쌓기도 한다. 화단은 앞마당 담장 밑에 장방형으로 석단을 쌓아 만들고, 화계는 보통 뒷 뜰 구릉지에 석단을 쌓고 꽃을 심어 만든다. 석계는 잘 다듬은 장대석이나 막돌로 쌓는데 기단에 설치되는 경우와 높낮이가 다른 마당 사이를 이어 주기 위해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다.

(10) 연못과 정자

일반적으로 주택에서는 별당마당이나 행랑채 밖 넓은 터에 방지를 파고 정자를 세우며, 궁궐에서는 주로 뒷 뜰에 축조된다.
연못은 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에는 석루조를 두기도 하고, 물이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면서 넘쳐 나갈 수 있게 수구나 도랑을 만든다. 또 연못가 또는 섬에는 정자나 루를 건축한다.

(11) 징검돌, 돌길

징검돌은 주택이나 사찰 등에서 널리 쓰이지만, 궁궐에서는 돌들을 깔아 돌길을 만드는데, 특히 임금이 다니는 길을 어도라 부르는 특수한 돌길을 만든다. 어도는 정전 앞이나 종묘와 같은 의식적인 공간에 만들어지는데, 세부분으로 나뉘고 중앙이 양쪽보다 한층 높게 돌을 까는 것이다. 정검돌이나 돌길은 모두 마당의 마감재의 재질이나 색조와 대조를 이루면서 방향성을 가지기 때문에 외부 공간 구성요소의 중요한 시각요소가 된다.

(12) 식재

식재는 수목, 화초, 채소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이들은 비록 건축 그 자체는 아니지만 외부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시각요소들이 된다. 수목은 건조한 곳과 습한 곳, 양지와 음지를 구별하여 적당한 수목을 택하여 심는다. 화초는 꽃을 피우는 꽃과, 잎만 무성한 풀로 나뉘는데 이들은 일년생이거나 다년생을 막론하고 그 크기가 한 길 넘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다. 채소는 배추, 무우, 마늘, 상추들로서 옆마당 뒷마당 등에 빈터가 있으면 심어 식생활에 이용된다. 뜰에 심는 이들 식재들 은 거의 모두가 철따라 잎이 돋고 잎이 무성하며, 단풍들고, 잎이 지는 활엽수 계통의 것들인바 이는 한반도의 자연환경에 조화시키려는 구성 원리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13) 마당

마당은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에 형성되는 평평한 땅으로, 한국건축에 있어서는 집터주위를 담장으로 둘러막고 그 속에 여러 개의 건물을 세우기 때문에 여러 개의 마당이 형성된다. 즉 앞마당, 뒷마당 또는 행랑마당, 사랑마당, 안마당, 일마당, 바깥마당 등으로 분류된다.

(14) 담장

담장은 그 건축주의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의장을 달리한다. 즉 서민 주택의 담장은 돌담이나 흙담으로서, 그 상부에 설치하는 지붕은 초가지붕으로 처리하여 주건축의 지붕과 동일하게 한다. 또 중?상류 주택이나 사찰 관아 건축에서는 기와지붕을 하며, 궁궐에서는 담장에 양동을 설치 뚜렷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바, 궁궐의 담장은 주택의 담장보다 훨씬 높다. 또 한국의 담장은 경사면을 따라 담장이 내려올 때 윗면이 경사지는 것이 아니라 수평으로 단을 만들면서 건축되기 때문에 독특한 율동미를 가지고 있다. 서민 주택에서는 담장이 단순히 대지의 경계선을 상징하는 성격이 강하고, 상류주택에서는 외부에 대한 방어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 한식기와 관련용어

암키와 : 오목한 곡면으로 된 장방형의 기와, 바닥기와
수키와 : 반원형으로 되고 끝에 언강이 달린 기와
내림새 : 드림판이 달린 암키와 = 암막새
막새 : 드림판이 달린 수키와 = 수막새
망새 : 지붕마루 끝에 엎어대는 내림새 모량의 기와, 바래기기와 = 망와
수망새 : 수망와, 지붕마루 끝에 대는 막새모양의 기와, 곱새기와
귀내림새 : 양면에 드림이 달린 모서리(왕지)용의 암기와 ,귀내새
귀막새 : 드림새가 꺽인 듯이 보이는 모서리용의 수기와
연목막새 : 서까래 끝마구리에 붙여대는 장식판 기와, 초가리기와
부연막새 : 부연 끝마구리에 붙에 대는 장식판 기와, 부연초가리
용머리 : 지붕마루에 얹는 상징적 장식기와
취두 : 권위 건물의 용마루 끝에 대는 장식기와
치미 : 큰 독수리의 꼬리모양으로 된 고대 건물의 용마루 장식기와
잡상 : 수호신.수호수를 상징하는 귀마루.내림마루의 장식기와
귀면와 : 지붕마루끈, 추녀 사래면에 세워대는 귀면모양을 새긴 장식기와
모골기와 : 드림무늬를 찍는 원판을 진흙을 빗어 구어 만든 것
연가 : 굴뚝지방에 설치하는 장식
연봉 : 막새를 고정하는 못머리에 꽂아 장식하는 도자기, 도련
토수 : 추녀.사래끝 마구리에 끼워대는 장식기와
토수기와 : 지름이 앞머리는 크고 뒤뿌리는 작게 만든 수키와
곡여와 : 용마루가 없는 지붕마루턱에 덮는 굽은 암키와, 여곡와
곡부와 : 용마루가 없는 지붕마루턱에 덮는 굽은 수키와, 부곡와
타원막새 : 드림새(드림판)가 타원형으로 된 숫막새
절병통(節甁桶) : 정자지붕의 꼭대기에 설치하는 장식기와. 사모. 육모. 팔모지붕에서 추녀마루들이 지붕 꼭대기에 다 모아졌을 때 그 정상에 올려 놓는 흙. 돌 .쇠붙이로 만든 것. 대략 병 모양이며, 둥글거나 팔모로 접어 만든다.
기왓골 : 바닥기와를 처마로부터 용마루까지 깔고 수키와를 덮은 고랑을 일컫는 말.
기와춤 : 수키와를 이을 때 암키와에서 수키와등까지의 높이.
북수 : 기와로 만든 홈통. 하수구용으로도 쓰임
물매 : 급한 경사도를 물매가 싸다라고 하고 경사가 완만하면 물매가 뜨다고 한다.
마루높이 : 지표에서 용마루까지의 높이. 집의 총고(總高).
방초막이 : 방초(막새)가 흐르지 않도록 방초정(防草釘, 와정)을 박는 일
방초정, 와정(瓦釘) : 수키와가 흘러내리지 못하도록 수키와 등에 뚫어 놓은 구멍에 박는 가늘고 긴 쇠못.
와서(瓦署) : 나라에서 쓸 기와를 굽는 일을 맡은 관아.
별와서(別瓦署) : 민간에 기와를 공급하던 관아
와요(瓦窯) : 기와를 굽는 공장. 기와를 굽는 가마
와의(瓦衣) : 기와지붕에 나는 풀
번와(燔瓦, 飜瓦) : 기와를 굽는 일. 오래된 지붕을 고치는 일
와구(瓦溝) : 기왓고랑.
와도(瓦刀) : 기와 잇는 일 에 쓰이는 연장.
와봉(瓦縫) : 기와를 이은 이음새.
와즙(瓦葺) : 기와로 지붕을 이음.
와구토(渦口土) : 막새 대신 기와골 끝의 수키와에 회(灰)물림 한 것. 아구토
언강 : 수키와를 연접시킬 때 접합하게 된 부분. 턱이 만들어진다.
왕지기와 : 추녀나 사래 끝에 암키와를 크게 만들거나 두 개를 덧대어 만들어 귀를 세우게 한 것. 박공의 소슬각 등에 삼각형으로 깎아 얹는 암키와.
착고(着高) : 당골을 써서 적새밑둥의 기와골을 막은 것.
당골(단골) : 기와지붕에서 쓰는 반동강의 기와.
당골막이(단골매기) : 단골을 써서 기와골이 용마루에 닿는 부분을 정리한 것. 또는 그렇게 하는 일.
적새 : 마루를 만들 때 겹쳐 쌓는 암키와
부고 : 착고매기한 위에 덧 놓은 수키와
개와장(蓋瓦匠) : 기와를 잇는 사람, 개장(蓋匠), 기와쟁이, 개와장
와장(瓦匠). 와박사(瓦博士) : 기와를 만드는 장인
※초가의 경우
개초(蓋草) : 이엉, 이엉으로 지붕을 잇는 일
개초장(蓋草匠) : 지붕을 잇는 일을 업으로 하는 장인
개초장이, 이어장이, 초즙장이 : 초가지붕을 잇는 일을 하는 전문가



한옥의 개요 [1]

1]. 한옥의 형성과정
우리나라는 전 국토의 75%가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고 험준한 산이 비교적 적은 노년기 지형이다. 산봉우리 또한 완만하며 작은 구릉이 모여 준평원, 산간분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지형적으로 작은 규모의 하천들이 모여 강을 이루어가는 형태이다. 이런 특성으로 옛 선조들은 마을 뒤쪽이 산으로 둘러싸인 배산 지형을 택지로 선정하기가 용이하게 되였으며 택지 선정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풍수지리를 적용하는 지혜를 다양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대륙의 동쪽 해안 끝에 돌출되어 나온 반도로서 북쪽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 대륙에 인접해 있고, 남쪽은 해협 너머로 일본 열도가 바라보이는 위치에 놓여 있고 육로 또는 수로로 중국과의 왕래도 쉬워 고대로부터 중국 문화가 전파되어 왔으며 대륙 문화가 자연스레 우리를 통해 일본에 전파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그러한 지형학적 특성으로 인해 대륙적이며 도서적인 이중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고 우리의 문화 자체도 원만하면서도 격정적이며, 낙천적이면서도 감상적이고, 또 적극적이면서 보수성을 함께 지니게 된 것 같다.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어 온 우리의 삶의 문화 주체인 전통주택, 한옥은 이러한 입지조건과 문화적 특성이 잘 나타나, 중국과 일본 주택과는 전혀 다른 중간적이며 이중적인 지형학적 특성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2]. 한옥의 구분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하는 집 형태로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고루 갖추었던 조선시대 상류층의 솟을 대문이 있는 주택을 상류 주택이라 하였으며 이들 상류주택은 경제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이 지었으므로 규모가 있게 지어지고 주택의 장식부분도 섬세하게 많은 부분에 신경을 써 대개의 상류주택들은 주택의 기능적인 면에서 뿐 아니라 예술적 가치가 많은 집들이 되었다.

또한 신분이 좀 낮은 농민이라도 재력이 있으면 규모가 큰 중류 주택을 지어 살았으며 사대부, 양반과 같은 상류층 중에도 경제력이 없거나 안빈낙도의 선비정신을 중히 여겼던 사람들은 검소한 서민 주택에서 살았다.

통상 민가(民家)란 백성의 집이란 뜻이지만 일반적으로 중하류 층의 서민들이 살았던 집을 '민가' 라 부르는데 초가지붕이 민가를 상징할 정도로 가장 흔히 쓰인 서민주택의 지붕형태 이였다.
민가의 형태 또한 지형적, 기후적 여건, 지방의 경제상태 등에 따라 규모나 건물 배치 방식이 달랐으며 특히 기후적 영향으로 지방마다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게 된다.

서민들은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못하기에 주택을 지을 때도 장식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이고 기능적인 면을 중시하여 대부분 방과 대청, 부엌으로 구성된 단순구조를 지녔다.

3]. 한옥의 기능적 분류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4계절이 분명한 우리 기후 특성에 맞게 난방을 위한 온돌과 냉방을 위한 마루가 균형 있게 결합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대륙성 기후와 해양성 기후가 공존하는 한반도의 더위와 추위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우리만의 독특한 주거 형식이 된 것이다.
한옥의 형태는 지방에 따라 구조가 다르며 북부 지방에서는 외부의 냉기를 막고, 내부의 열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구조로, 방을 두 줄로 배열하는 형태의 겹집 구조와 낮은 지붕의 한옥이 발달했으며 이에 비하여 남부 지방에서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방을 한 줄로 배열하는 홑집 구조와 마루 구조가 발달하게 되었다.

또한, 한옥은 상류주택과 민가에 따라서도 구조를 달리하며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한국의 전통사회에서 상류 계층의 주택은 신분과 남녀, 장유(長幼)를 구별한 공간 배치구조를 하였으며 즉, 집채를 달리하거나 작은 담장을 세워 주거 공간을 상ㆍ중ㆍ하로 구획했다.
상(上)의 공간인 안채와 사랑채는 양반들이 사용했고, 대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는 행랑채는 하(下)의 공간으로 머슴들이 기거하는 곳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는 중(中)의 공간이었다. 상류주택은 장식적인 면에도 치중하여 주택의 기능면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가치에서도 뛰어난 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집을 지을 때도 구조에서부터 재료에 이르기까지 장식적인 면보다는 기능적인 면을 더 중시하므로 재료로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과 나무들을 사용했는데, 기둥과 서까래, 문, 대청바닥 등은 나무를 썼고, 벽은 짚과 흙을 섞은 흙벽으로 만들었으며, 창에는 역시 천연 나무로 만든 한지를 발랐습니다. 바닥에는 한지를 깐 뒤 콩기름 등을 발라 윤기를 냈고, 방수의 역할도 하게 하였다.
지붕으로는 기와지붕과 초가지붕이 가장 보편적입니다. 부유한 집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올렸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서는 대부분 볏짚으로 이은 초가지붕을 얹었다. 초가지붕은 겨울에는 열을 빼앗기지 않고 여름에는 강렬한 태양열을 차단해 주며, 구하기 쉽고 비도 잘 스며들지 않아 지붕의 재료로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면 좀 더 세부적으로 분류해 나가면서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 살아가며 어떻게 발전적으로 변해왔으며 구체적으로 방의 구조별 특색을 살펴보기로 하면서 향후 이러한 구조적, 기능적, 소재별 소제목을 선정하여 연재해 나가기로 하겠다.

아름다운 집-한옥의 기능적 분류[2]
1]. 대청:

▲ [대청]주변의 여러구조
안채의 안방과 건넌방, 사랑채의 사랑큰방 앞의 넓은 마루를 ‘대청’이라 칭한다.
대청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의식과 권위를 표현하는 상징적인 공간이며 각각의 방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오늘날 주택의 거실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여름철에 분합문을 서까래 밑에 내려진 들쇠에 걸어 올려놓으면 대청은 열린 공간으로 생활의 중심이 되는 공간이 되었으며 겨울철에는 분합문을 닫아 한기를 막고 대청공간을 아늑한 실내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에 있는 것을 ‘안대청’이라 하며 사랑채에 면해있으면 ‘사랑대청’이라 한다. 대청은 한여름의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현명하게 고안한 가옥의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전면 또는 사방이 트여있어 엄밀히 말하면 실내라고 할 수 없다.
대청의 바닥은 상류주택에서 서민주택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우물마루가 쓰여 졌다.
대청의 구조를 보면, 마당에서 대청으로 오르기 위한 기단이 있고, 그 위에 댓돌이 있으며 댓돌에서 바로 올라서면 대청 앞쪽으로는 대개 앞 툇마루가 있다. 대청의 크기에 따라 기둥의 수가 다른데 보통 대청의 크기는 2칸에서 8칸까지 다양하다.
2]. 방
전통주택에서 ‘방’은 열린 공간인 대청과 반대되는 폐쇄적인 의미를 지닌 개인적인 공간이다.
잠을 자고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는 전통가옥에서의 방은 잠을 잘 때는 침대 대신 따뜻한 구들 방바닥위에 이부자리를 펴고 자고 낮에는 의자대신 방석에 앉아 지내는 좌식생활을 하도록 되어있는 공간이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바닥에 바로 앉아서 생활하기 때문에 방을 늘 청결하게 유지하였으며 방의 내부는 모두 벽지나 천장지를 발랐으며 바닥은 장판지로 마감하였다.
3]. 사랑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진 사랑채의 ‘사랑’은 집안의 가장인 남자 어른이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하는 방으로 남자들의 공간 이였다.
사랑채는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게 숙식을 대접하는 장소로 쓰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 어른이 어린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4]. 사당
조상숭배 의식의 정착과 함께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시였다. 각 위 앞에는 탁자를 놓으며 향탁은 최 존위 앞에 놓았으며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 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있어 그런 집에서는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셨다.
5]. 찬방
‘찬방’ 또는 ‘찬마루’라고 불리는 이곳은 오늘날의 주택의 부엌방과 다용도실 정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반가나 중, 상류 지방의 가옥에서 볼 수 있는 부엌과 인접한 공간이다.
부엌과는 문으로 연결되어 있어 부엌에서 조리된 음식을 이곳에서 상에 올려 안방, 사랑방 등으로 내갔으며 간단한 음식은 이곳에서 조리하였다.
이곳에는 상을 차리는데 필요한 그릇, 식기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도 쓰였다.
6]. 부엌
불을 지펴서 각종음식을 조리하는 공간인 ‘부엌’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인 안채에 안방과 바로 인접하여 위치하였으나 일부 대가들의 집에는 반빗간이라 하여 별채로 독립시키기도 하였다.
전통한옥의 부엌은 작업 동선을 고려해볼 때 매우 불편한 구조를 지녔으며 부엌 바닥을 일반적으로 방바닥보다 75-90 cm 정도 낮게 하여 아궁이에서 땐 불길을 방고래로 빨아 들이도록 되어 있는'온돌구조' 때문이다.
부엌에는 2-4개의 아궁이가 있었으며 불을 때는 아궁이 위 부뚜막에는 솥을 걸어두었습니다. 아궁이는 안방과 면한 벽 쪽에 설치하여 음식물을 조리하면서 동시에 방을 데우도록 하였으며 부엌은 주택의 규모에 따라 안방과 건넌방에 각각 위치하는데 안방과 접한 부엌이 주된 조리 공간이었으며 건넌방 쪽은 물을 데우는데 쓰이는 등 보조적인 공간으로 이용되었다.

내가 살고 싶은 전통 한옥 짓기 : 문화저널21 발췌



아름다운 집-한옥의 특성[3]
우리 선조가 살고 있던 집을 통상 한옥이라 부르듯, 한옥은 주로 목조로 만든 건물이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의 목조라는 집들과는 차이가 없으나 꾸미는 방식에서 크게 차이를 지녀왔다.
또한 한옥의 가장 큰 특징은 마루와 온돌이 있다는 것이며, 거기에 적절한 일사량을 유지시켜주는 조상의 지혜가 서려있는 마당과의 한옥의 조화는 한옥의 멋스러움과 우리의 선조들의 지혜를 여러모로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마루와 온돌은 그 성질상 특히 상반된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마루는 개방적인 남방문화의 소산이요 온돌은 폐쇄적인 북방문화의 소산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두 개의 기능이 함께 존재하는 한옥의 특징은 우리 기후에 가장 적합한 기능의 완결성을 의미한다. 마루와 온돌은 오랜 기간을 통해 선택과 적응의 과정을 거쳐 전해 내려 왔으나 온돌의 경우 제주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역에서 거의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 잡은데 비해 마루는 민가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고 그 유형도 지역이나 집의 규모에 따라 달리 나타나고 있다.
기능적으로 보면 마루는 마당 쪽으로 완전히 개방되어 마당과 유기적으로 엇물리는 공간이 되며, 내부공간의 엇물림은 건축적 공간성을 높여주는 우수한 방법이고 좁고 한정된 내부공간을 외부로 확장하거나 외부공간이 내부에 침투할 수 있는 공간의 신축성 또는 탄력성을 부여하는 우수한 연결방식으로 볼 수 있다. 또 앞마당 쪽으로만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뒷문을 열면 후원과도 연결되어 상호 관통하는 공간이 되게 한다. 따라서 마루는 외부와 내부공간을 이어주는 반 외부공간인 동시에 평면적으로는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고 공간을 중계하는 매개공간이라 볼 수 있다.
▲ 대청마루
앞장에서도 간략히 설명한 안방과 건넛방, 혹은 사랑방과 누마루 사이에 위치하여 두 개의 공간을 서로 연결하면서 기능적으로는 중간 역할을 하는 곳이다. 또 마루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또 다른 측면의 매개공간이 되기도 하였다. 집 전체를 관장하는 성주신의 성주단지를 모시는 곳이 이곳이고 제사를 지내고 상청을 차리는 관혼상제의 공간과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마루이기 때문이다. 즉 신이라는 존재와 인간이라는 상, 하의 두 존재가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 형성되어야 하는데 이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곳이 마루이다.
한편으로 상류주택의 경우 가장 권위 있는 공간은 누마루가 된다. 누마루는 형태상으로는 고상식이고, 기능적으로는 여름에 습기를 피하면서 조망, 휴식을 위한 공간이다. 대청마루가 대개 한 면이나 두 면이 개방되는데 비하여 누마루는 세면이 개방되어 있어 외부의 수려한 풍광을 집안으로 끌어 당겨주는 공간이 된다. 따라서 누마루가 있는 공간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경관과 아울러 밖에서 보면 전체 집모양의 수평적, 수직적인 요소를 제공하는 상승공간이 된다. 따라서 외부에서 보이는 지붕 선은 수직과수평적 지붕에 크기가 다른 합각부분이 전후좌우에 중첩 배치되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룬다.
한없이 단순하고 부드러운 조화미, 어디서나 맛 볼 수 있는 정교한 아름다움, 면으로 치장된 벽체와 어우러져 나타내는 여백의 미, 아침 햇살을 가득 받아 표현되는 담백한 선, 창살과 창호지의 새하얀 멋과 어우러진 잘 닦인 앞마루의 고요한 선미. 이 모든 것이 한국인의 정서와 심미안을 나타내는 마루가 보여주는 우리의 마음인 것이다.

가]. 용도별 분류
1]. 안채: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는 안공간인 ‘안채’는 보통 안방, 안대청, 건넌방, 부엌으로 구성되어있다. 안채의 안방은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실내 공간 중에서도 상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출산, 임종 등 집안의 중요한 일이 이뤄지던 여성들의 주된 생활공간입니다. 그러기에 안채는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인 북쪽에 위치하며 이는 여성의 사회생활을 꺼려하여 남편이나 친척 외에는 남자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등 여성의 외부와의 출입을 제한하던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는 공간배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랑채와 달리 학문탐구 등의 활동공간이라기 보다는 가족들의 의식주를 전담하는 공간으로 가구류도 의복과 침구류 보관을 위한 수납용가구 등이 통상 놓여있다.
2]. 사랑채:

외부로부터 온 손님들에 대한 숙식으로 대접하는 장소이거나 이웃이나 친지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집안의 어른이 자녀들에게 학문과 교양을 교육하는 장소로 ‘사랑채’라고 하였습니다.
주로 사대부 남자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 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영위한 것도 사랑채에서 하였으며 부유한 집안의 경우는 사랑채가 독립된 건물로 있었지만 일반적인 농가에서는 주로 대문 가까이의 바깥쪽 방을 사랑방으로 정해 남자들만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사랑채는 보통 사랑대청과 사랑방으로 구성되며 부유한 집안은 누마루를 마련하며 한층 품위를 살렸고 사랑방은 사랑채의 주요 공간으로 주인과 귀한 손님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활용 되었다.
상류주택의 사랑방은 기거와 침식 외에도 독서, 예술 활동, 접대 등의 많은 행위가 이루어졌던 중요한 공간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문필문학을 존중하며 경전을 연구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조선시대에는 가히 사랑방문화라고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유교적인 생활을 지향하는 선비의식의 영향으로 사랑방의 가구나 장식은 매우 간소하게 꾸며져 보통 몇 개의 방석과 작은 책상, 책장, 장농, 문방소품 등으로 구성되었다.
3]. 사당채: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 안채의 안대청 뒤쪽이나 사랑채의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이라는 의례 공간을 마련, 조상숭배 의식의 정착과 함께 별도의 공간을 두기도 하였다. 보통 사당에는 4개의 신위를 모시는데 서쪽부터 고조의 신위, 증조의 신위, 할아버지의 신위를 모시며 마지막에 부모의 신위를 모셨습니다. 각 위 앞에는 탁자를 놓고 향탁은 최 존위 앞에 놓았으며 대개의 중상류 주택은 가묘 법에 따라 사당을 건축하지만 사당이 없는 집도 많아 통상 대청마루에 벽감을 설치하여 신위를 모시는 경우도 있었다.
4]. 행랑채:

‘행랑채’라 하여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 등을 저장해두는 창고로서 쓰였던 공간이 따로 있었다. 이것은 상하 신분제도의 영향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공간을 다르게 배치하였던 것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안의 경우에는 하(下) 공간인 행랑채는 그 주택의 규모에 따라 '바깥행랑채'만 또는 '중문간 행랑채'도 존재 하였으며 바깥행랑채는 대문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집안에서 가장 신분이 낮은 머슴들이 기거하는 공간이었으며 중문간 행랑채는 양반들이 기거하는 안채, 사랑채와의 중간(中間)공간으로 집안의 중간 계층인 청지기가 거처하였다. 이들 공간들은 커다란 한 울타리 안에 작은 담장을 세우거나 채를 분리하여 구획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상류주택은 신분과 남녀별, 장유별로 공간을 분리하여 대가족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당시의 가족생활을 고려한 공간 배치를 한 것입니다.
5]. 별당채:

통상 ‘초당’이라 불리기도 하는 별당은 규모가 있는 집안의 가옥에선 별당이 안채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게 불리어지도 하였으며 결혼 전의 딸들이 주로 기거하며 또한 결혼 전의 남자 아이들의 글공부를 위해 '서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는 집도 있었다.
6]. 곳간채:

중상류층이상의 주택에서도 부유한 집안들은 수십 칸 규모의 주택을 짓고 살았으며 이들 '칸' 수가 많은 전통주택에는 ‘곳간채’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어 오래도록 저장 해두어야 할 음식이나 여러 가지 생활용품들을 저장, 보관하는 공간입니다.

나]. 구조적 분류
1]. 누마루:
▲ 누마루

‘누마루’는 기단 없이 기둥위에 설치된 형태로 주로 사랑채에 설치되어 원두막처럼 마루바닥 밑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사방이 트인 노출공간이다. 대청처럼 여름에는 문을 걸어 올려 주변의 자연과의 운치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하고 겨울철에는 문을 닫아 한기를 막았습니다.
2]. 다락:

▲ 다락
‘다락’은 안방의 아랫목 쪽 벽과 부엌과 면한 벽 쪽에 방바닥에서 45cm[1.5척]되는 곳에 설치된 수납공간이다. 이 다락에는 귀한 음식에서부터 가재도구 등 살림살이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입니다.
3]. 담:

▲ 담장
전통가옥은 ‘담’과 함께하는 문화라 할 정도로 ‘담’은 치안을 위해서 높이 쌓거나 위협적으로 쌓는 일이 없이 나지막하며 은은한 장식을 두어 시적(詩的)감흥을 고취시킨 운치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담장을 장식한 무늬는 풍요와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많았으며 일반 농가의 경우, 지나가는 사람도 담 너머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나지막하게 쌓아 단지 집 밖과 집 안을 구분한다는 의미에서 둘러놓은 경우가 많았으며 민가에는 특별히 담장이나 대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경우도 많아서 싸리나무를 집 둘레에 심어 경계를 나타내거나 아예 대문이 없거나 사립문이 있더라도 늘 열어 놓고 살았다.
문은 닫아놓아 공간을 단절한다는 의미보다는 늘 열어놓고 통과하는 데 더 많은 의미를 두었기 때문에 한국의 문들은 대부분 늘 열려 있습니다.

4]. 기둥:
‘기둥’에 대해선 단면 형태로 구분하여 보면 [원기둥]과 [각기둥]이 있고 위치에 따라 구분하면 건물의 외곽에는 [외진주], 내부에는 [내진주]가 있다.
가.단면형태(기둥 깎는 기법)에 따른 분류

▲ 단면형태분류
*원(圓)기둥
-원통기둥 : 기둥 위부터 아래까지 일정한 굵기.
[건축물] : 송광사 국사전, 내소사 대웅보전
-민흘림기둥 : 안정감과 착각교정을 하기 위해 기둥위보다 아래가 작은 기둥.
[건축물] : 개암사 대웅전, 쌍봉사 대웅전, 화엄사 각황전, 서울 남대문
-배흘림기둥 : 육중한 지붕을 안전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기둥 높이의 1/3정도 에서 가장 굵어졌다가 다시 차츰 가늘어 시각적 안정감을 주는 기둥.
[건축물] :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무위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과 대웅전, 해인사 대장경 판고,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각(角)기둥
-4각주(四角柱) : 일반주택이나 장식이 덜한 건축물에 사용.
[건축물] : 정림사지탑, 익산 미륵사지 탑, 경회루 향원정
-6각주(六角柱) : 건축물 평면이 6각인 정자 건축물에 사용.
[건축물] : 경복궁 향원정
-8각주(八角柱) : 장식이 많은 건축물에 사용.
[건축물] : 쌍용총 8각 석주, 석굴암 8각 석주

나.위치에 따른 분류
*외진주(外陳柱)(바깥기둥: 평주(평기둥)와 우주(귀기둥) ): 소규모의 구조물에 사용
*내진주(內陳柱)(안기둥: 고주, 단주, 실심주):고주는 대부부의 구조물에 사용되며 중층건축물에 사용되는 단주와 다층건축물과 목조 탑파 형식에 사용되는 실심주가 있음
*동자주(童子柱)(활주) : 추녀부분의 처짐을 방지

5]. 온돌:

온돌은 신석기시대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오래된 우리의 난방구조이다. 움집을 짓고 살면서 기능별 공간이 구분되지 않은 채 가운데를 둥글게 파고 그곳에 불을 피워 취사와 난방 그리고 조명으로 사용하였고 주위로 냇돌을 대어 불의 번짐을 막음과 동시에 잔열도 이용한 흔적이 남아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를 온돌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중기까지도 온돌은 일반 민중들이 선호하는 시설이었을 뿐 그 당시 지배계층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중국이 입식생활을 한 관계로 우리나라 지배층도 입식생활을 선호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노약자나 병자를 위한 공간 즉 집의 일부분으로 온돌을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가 되어서야 온돌이 일반화된 것 같다. 따라서 원래는 우리도 중국과 같은 부분온돌이 나중에 전면온돌로 바뀌면서 우리의 생활습관 자체가 입식생활에서 좌식생활로 바뀌었으며 이러한 연유로 신을 벗고 생활하는 우리 주거의 공간 구성으로 형성되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게 된다.
‘온돌’은 열의 전도, 복사, 대류를 이용한 한국 고유의 난방 방식입니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가옥의 구조에도 계절적 온도 변화를 고려하였습니다. 방을 따뜻하게 데우는 구들과 여름이면 사방으로 바람이 통하도록 되어있는 대청이 공존하는 가옥 구조형태인 것이다.
추운 날에는 아궁이에 불을 때, 방바닥 밑의 구들장을 데워 방안을 따뜻하게 하였으며 아궁이에 불을 때면 그 열기로 인해서 음식도 조리하게 되었으며 경사진 부넘기를 넘은 열과 연기는 아궁이로 내닫지 않고 개자리에 이르며 그 열과 연기는 개자리에서 머물다 굴뚝을 통해 빠져 나가므로 구들은 오랫동안 온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온돌의 효능을 익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궁이와 구들은 어느 지방이나 거의 비슷한 형태지만 굴뚝은 지역마다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이것은 북방지역은 열도 뺏기지 않아야 하고 서북풍이 역류해도 안 되기에 굴뚝을 어디에 두느냐에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굴뚝을 그냥 외기에 노출시키지 않게 두껍게 감싸 외기를 차단하고 개자리를 파서 열기가 더 머물 수 있도록 하였을 뿐 아니라 역풍이 들어와도 차단하는 기능을 발휘를 하였다.
남방지역은 북방지역보다 훨씬 따뜻한 기후로 굴뚝에 대한 세심한 주의가 필요가 없었으니 고래 끝에 구멍 날을 내어 개굴을 노출시킬 정도로 북방지역과는 다른 형태의 굴뚝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6]. 창:

▲ 창
‘창’이라 함은 문과 같은 형식이지만 머름대 위에 설치되거나 크기가 문보다 작은 것을 창이라 합니다. 창은 채광, 통풍을 위하여 홑창호지를 바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창살 문양 또한 취향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였다. 상류주택에서는 일반적인 사각형의 창외에 그리 많지는 않으나 원창, 반월창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전통한옥의 창은 창호지를 사용하였고 또 문풍지가 있어 따로 환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고정된 봉창 같은 것이 발달하기도 하였으며 창에는 봉창, 화창, 광창, 교창, 눈곱재기창, 살창, 갑창 등이 있습니다.
7]. 창호지: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문과 창문은 격자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의 나무 창살을 만든 후 그 위에 한지를 발라 채광과 통풍을 고려하였으며 투명한 유리가 아닌, 한지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강렬하지도 않고 은은하며 방안 분위기를 한층 차분하고 아늑하게 만들었다.
한지는 채광뿐 아니라 통풍에도 재료적 특성으로 조금씩이나마 방안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밖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며 공기의 순환을 시켜준다.

이렇게 공기를 순환시켜줌으로써 뜨거운 구들바닥으로 인해서 건조해지기 쉬운 방안의 온도와 습도를 항시 적당하게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8]. 문:

▲ 문
조선시대 주택의 출입문은 위치나 용도에 따라 그 구성 및 모양을 달리할 정도로 다양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엌의 출입문이나 대청 뒷면의 문은 판장문과 같은 두꺼운 문을 설치하였고
▲ 들어열개문
대청에는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였는데, 보통 문은 이중문으로 바깥쪽의 것을 덧문이라고 하여 방한과 방충 등의 용도이며 방과 방 사이에는 샛장지를 설치하고, 때로는 갑장지문을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장지문들에는 채광을 고려하여 창호지를 발랐는데, 문살은 완자살과 아자살이 대부분이고, 이처럼 문살을 세밀하게 나눈 세살문은 모두 쌍여닫이, 미닫이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의 북쪽으로 갈수록 문살의 밀도가 낮은 정자문살이 사용되었으며, 남쪽으로 갈수록 문살의 밀도가 높은 창살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일조량이 적은 북쪽에서는 보다 많은 빛을 방 안에 들이기 위해, 남쪽에서는 보다 적은 빛을 방 안에 들이기 위해 문에서 종이의 면적과 살의 비율을 달리한 것이다.

문의 종류에는 판장문, 골판문, 맹장지문, 도듬문, 불발기문, 장지문, 분합문, 두껍닫이문 등이 있습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친환경 생태 한옥
가] 한옥이 좋은 이유

1] 자연과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이상공간 한옥
▲ 자연과의 조화로운 한옥 모습
자연을 관조하며 거기에서 생의 유연함을 배우며 살아왔던 한국인들은 집을 지을 때에도 반드시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도록 집의 방향을 잡으면서도 결코 사치스럽지 않고 궁색스럽지 않은 단정한 집을 지었다. 결국 이런 지형에 맞는 집은 우리가 사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삶의 영유와 편안함, 안정감 등을 고려하여 살아가며 풍수에 맞도록 적응해 보이며 뒤로는 겹겹이 둘러싸인 산들과 앞으로 펼쳐진 넓은 평야에 파묻힌 아담한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주위의 경관요소를 거슬리지 않는 곳에다 주변에서 나오는 재료를 사용, 지세에 맞는 형태로 집을 짓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집주위에 산재해 있는 바람, 들, 풀, 그리고 하늘까지도 모든 자연요소를 집안으로 끌어 드렸다. 자연과 집, 그리고 그 안에서 생활하는 인간은 서로가 남이 아닌 일체감을 갖는 하나의 완벽한 이상체인 것이다.
자연 속에서 함양된 우리의 의식은 집을 지을 때에도 되도록 인공적인 기교나 장식을 피하며 자연 그대로의 재료를 가지고 자연친화적인 편안한 집을 지은 것이며 가령 나무를 쓰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나무둥지에 가지만 잘라내 사용하였으며 주춧돌과 밀착되는 면도 다듬지 않은 상태에 그대로 밀착시킬 정도로 한옥의 가구에서 가장 중요한 대들보마저도 나무가 휘어져 있으면 그 상태 그대로 사용하였을 정도이니 한옥에서는 우리 주위의 자연재료를 가지고 인공을 가하지 않은 상태로 사용하여 한옥의 구조적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던 것이며 이는 농본 문화적 특성을 가진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을 행함에 있어 자연과의 조화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2] 풍수에 맞게 설계된 살림집의 이상형 한옥
통상 ‘집터’는 들녘을 피해 산기슭에 올라서서 지었다. 산기슭의 집터는 조건이 까다로워 뒷산이 날카로우면 인격 함양에서 심성이 메마르고 단기에 치우친다하며 뒤쪽 산형이 둥글고 너그러우면 덕기가 넘친다고 하여 그런 지형을 택하여 예전부터 우리는 집을 짓기 전에 풍수를 고려했던 것이다. 또한 지형적으로 산사태가 날 자리엔 집터를 잡을 수 없고, 큰물이 쏟아지는 계곡도 마땅치 않아 집은 남향으로 짓는데 골짜기가 남향으로 열려야 볕이 잘 들며 이런 터전이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바람기가 있어 시원하다. 산의 능선 중 어느 한쪽이 낮아 바람이 휘몰아치면 나빠지기에 바람기도 온화해야 한다. 산은 고정되어 있으나 계곡의 물은 항상 흐르고 있어 산이 조건을 만족스럽게 구성하였다 해도 이 물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으니 따라서 물도 좋아야 하기에 이렇게 고루 갖추어진 터전을 골라 우리는 좋은 ‘집터’ 라고 하며 지어 왔다.

3] 현대건축과는 구별되는 한옥의 실내외 구분

4] 한옥은 마루와 구들의 절묘한 조합

▲ 마루와 구들의 조합
마루와 폐쇄적인 온돌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나?
구들 들인 온돌방은 벽으로 막아 밀폐시킨 데 비하여 마루의 다락집은 기둥과의 사이를 탁 터놓았다. 벽체가 구축되지 않은 것이다. 대신 겨울철이면 장막을 늘어뜨리고 여름이면 발을 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이 현상은 근세에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한옥에서는 마루 들인 부분에서는 기둥과의 사이를 터놓고 살고 있으며 방이 차지하는 공간이 증대되면 마루 있는 집은 더욱 합리적인 균형을 찾게 된다. 구들의 방과 마루가 적절하게 균제하여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낮은 바닥의 구들 시설인 방의 바닥은 높이하고, 높은 마루의 다락은 키를 낮게 해서 마침내 수평을 이루게 하며 결국 구들과 마루가 같은 높이에서 만나게 된다. 이 높이의 균제에서 한옥은 완성을 추구하게 되며 결국 우리의 한옥의 정형이라고 할 수 있다.

5] 주인의 쓰임새에 따라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

쓰임에 따라 필요에 따라 경내에 집을 따로 짓는다. 그중에서도 여러 채의 곳간이 건축되었는데 곳간채는 가을에 거두어들인 많은 양의 벼를 간수하기 위하여 지은 창고로 규모가 크며 습기를 조절할 수 있게 만들고, 쥐 등의 해로운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은 건물이다. 한옥 구성에서 행랑채가 또한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곳간으로 사용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처음에는 몇 칸만으로 만족되다가 그것이 부족하게 되면 필요에 따라 자꾸 증설해 나간다. 행랑채가 안행랑, 중행랑, 바깥 행랑 등으로 증가되는 까닭이 되는 것이다.

6] 인체를 기준한 한옥의 창설치

▲ 인체를 기준한 한옥의 창 모습
창은 머름대 위에 설치하며 두 짝 창을 달게 되는데 머름과 그 위에 세운 벽선과 인방이 구조하는 선상에 의하여 완성된다. 창은 주인의 식견과 성정을 잘 나타내는 얼굴이라 여겼기 에 이 부분의 구조에서 주인은 각별한 주의를 경주하였고 자기 식견을 드러내려 하였다.
창의 기본구조에서 그 설치 기준을 인체에 두었는데 머름대 높이를 앉은 사람의 겨드랑이 아래에 들도록 하며 가슴팍이 남실거리며 닿을 정도의 높이였다. 머름대의 높이는 문갑 등 실내 가구 제작에서 높이를 제한하는 절대 기준치가 되었으며 이러한 머름대가 있음으로 해서 방 안에 앉은 이는 안정감을 얻는다.
창은 바깥의 띠살무늬 덧문만 다는 경우도 있지만 그 안에 명장지의 미닫이와 맹장지의 갑창을 달기도 한다. 미닫이를 열면 두껍닫이 속에 묻혀서 창을 통하여 내다보는데 지장을 주지 않는다. 부자 집이나 격조를 따지는 집에서는 명장지 다음에 갑사천을 바른 사창을 하나 더 달기도 하는데 갑사는 현대의 방충망만큼이나 얇아 투명하며 통풍도 가능하여서 여름철에 시원하게 지내는 데 유익하다. 창살의 무늬 구성에도 유념하였고 두껍닫이에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 등을 써서 붙이고 바라보며 즐겼다. 이 두껍닫이는 전시용 벽면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7] 한옥은 안정감을 바탕으로 방의 넓이를 결정
▲ 안정감을 바탕으로 한 한옥의 방넓이 모습
방에 들어앉았을 때 아늑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방이 안정감이 있다는 것인데 한국 사람은 자기 몸을 기준으로 삼아 통상 안정감을 고려하는데 방의 넓이는 보통 한 변이 4.5m[15척]이었다. 형편이 좋아진다면 5.4m[18척] 넓이로 정할 수도 있고 신분이 높아지면 6.3m[21척]이나 7.2m[24척] 사방 넓이의 방에 살 수도 있었다. 4.5m[15척] *4.5m[15척]의 방 중앙에 사람이 앉았을 때 2.25m[7.5척]씩 간격이 좌우와 전후에 생겨난다. 여기에서 2.25m[7.5척]은 한국 사람들의 평균 신장 1.5m[5척]과, 앉은키의 눈높이까지의 평균치 0.75m[2.5척]이 합쳐진 것이다. 평면뿐만 아니라 입면 구성도 마찬가지이다. 방의 천장 높이를 보통 2.25m[7.5척]으로 잡는데 이는 앉은 키위에 서 있는 사람 한 길을 합한 수치이다. 방안에서 아랫목에 앉아 보면 방의 출입문은 대청에 있다. 마당에서 들여다보이는 앞 퇴마루에 면한 벽과 그 뒷벽엔 창만 설치한다. 대청에 면한 출입문은 세 짝, 네 짝, 여섯 짝이나 여덟 짝으로 만들어 단다. 가난한 집에서는 외짝 문을 달기도 하는데 외짝을 만든 것은 대청과 방 사이의 담벼락을 붙박이로 고정시키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다. 이런 외짝문은 아랫도리에 얇은 나무판자를 대고 그 위에는 살대로 무늬를 만들어 얇은 창호지를 바른다. 세 짝 이상의 문은 안팎으로 두껍게 바른다. 벽체와 같은 질감을 만들려는 것이다. 아랫목에 앉아 바라다보는 곳이 허하면 왠지 불안해지므로 아늑하게 꾸미려 창을 내었다. 이것을 불발기창이라 한다. 창의 살대 안쪽에 창호지를 발라 광선을 받는다. 불발기창은 문의 중간쯤에 설치되며 설치되는 기준선이 그 밑선 인데 이 선의 높이는 앉은 사람의 눈의 높이와 같도록 한다.

8] 기[氣를] 고려한 한옥의 대청마루

▲ 대청마루 모습
대청마루의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으로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서까래는 지붕의 빗물받이 물매에 따라 30도에서 60도 사이의 각도로 걸리게 되어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중심부가 높게 구조되고 좌우로 경사지게 되어 있다.
이 구조에서 중심부가 가장 높은 자리를 3m[10척]으로 잡았으며 한국 사람의 평균 신장이 5척이므로 마루 위에 서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한 길이 되는 여유를 두게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인간이 내뿜는 기는 하늘로 뻗치게 되어 억압되지 않은 채로 기가 승하여 의기양양한 인격으로 함양된다고 하여 평면과 입면설정에 이런 점을 유의하였던 것이다.
'왜 한옥이 좋은가?'


'왜 한옥이 좋은가?'
한옥에 대해 사람들은 막연하게 ‘친근감이 넘치고 조상들이 면면하게 살아와 우리 몸에 그저 정겹고 또 친환경적이다’ 라는 등의 말을 생각 한다. 조상 대대로 이 집에서 살아왔으며 우리세대 중 최소한 30대 이후의 사람들은 아파트나 빌라가 아닌 이런 집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었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왜 한옥이 나쁜가?’ 라는 질문인 경우엔 우리는 통상 ‘건축비가 비싸고 어딘지 비실용적이며 현대인의 편의주의와는 맞지 않다’ 라는 말도 있을 것입니다. 한옥 애호가의 한 사람으로써 우려하는 측면에서 몇 가지의 이유를 들어 설명을 하겠습니다.
가] 한옥은 우리 몸에 친화적이다
1] 친환경적인 자재의 사용
▲ 한옥의 친환경적 자재 사용
국내산 시멘트 가운데 약 60%에서 위암과 폐암, 피부질환 등을 일으키는 유해물질인 '6가크롬'이 기준치를 훨씬 초과하고 있는 것으로 이 수치는 일본 기준치의 3배 이상이라고 하는데 시멘트 없이 집을 짓는다는 건 요즘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 그 심각성을 더하고 있는 것 같으며 이 외에도 주택의 내부 공사 시에 사용되는 각종 건축자재에서 발생되는 화학성 유기화합물 등의 피해는 '새 집 증후군'이다 해서 심심치 않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문의조차 낯설어 하던 이 용어는 이제 모든 국민이 다 아는 상식어가 되어 더 이상의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의 한옥이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은 애매하나마 다 아는 일이지만 한옥을 건축할 때 사용하는 자재를 들어 설명한다면, 우선 한옥의 주요 자재는 나무와 흙으로 그것도 천연상태의 원목과 땅에서 바로 파낸 황토나 일반 흙인데 굳이 황토가 우리 몸에 좋은 원적외선을 다량 방출한다는 설명이 없어도 시멘트를 안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한옥의 장점입니다.
‘방부목’이라 하여 방부처리를 한 목재가 있습니다. 이것은 한옥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외국의 목조주택에서 주로 쓰는 나무이며 한옥을 지을 때 쓰는 나무는 아예 원목상태에서 목수들이 가공을 하거나 또는 제재소에서 제재한 나무를 목수가 음,양의 장부만 파고 그대로 뼈대로 이용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골조를 세우고 난 이후에 작업순서는 지붕입니다.

▲ 한옥의 개판을 까는 모습
서까래를 깔고 그 위에 개판을 올린 후 황토를 얹게 되는데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공법을 쓰고 있으며 비용절감을 위해 흙 대신 스티로폼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또한 한옥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옛날에는 서까래 위에 대나무나 싸리를 엮어 개판으로 이용했지만 요즘은 인건비 절감 상 대부분 넓은 판재를 쓴다는 것이 약간의 차이일 뿐 기와를 이지 않고 그냥 짚 이엉이나 갈대지붕, 너와 등으로 하는 현대 한옥은 방수시트를 까는데 콜타르가 발린 천을 개판위에다 깔고 그 위에 짚 등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기와는 흙으로 된 토기와나 경제적 이유로 시멘트 기와를 많이 씁니다.

여기까지 인체에 영향을 끼칠 소지가 있는 자재는 비용절감의 경우로 스티로폼과 방수시트정도입니다. 다음 공정은 벽체인데 대부분의 경우 황토 흙이나 황토벽돌을 쓰며 황토가 건조 시에 크랙의 우려가 있어 시공 후 다소 모양새와 시공 상에 불편하여 까다롭긴 합니다만 한옥 건축주의 대부분은 이를 무릅쓰고 황토의 장점이 여러모로 좋아 이 자재를 즐겨 쓰며 방바닥 역시 대부분, 황토로 미장을 하며 역시 비용절감을 위해 드문 경우, 시멘트 미장을 합니다. 이 경우에도 시멘트의 위해를 줄이기 위해 황토 흙으로 덧 칠를 합니다.
그리고 방바닥의 밑 부분, 즉 하인방 아래에 해당되는 벽체는 예외적으로 거의 대부분 시멘트나 또는 이것이 섞인 황토분말과 호박돌을 쓰는데, 이유는 방바닥 밑을 파고드는 쥐나 다른 해충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편이며 창호는 겨울의 한기 때문에 외부는 한옥 창을, 내부는 샤시 등의 현대 창호를 번갈아 많이 쓰는 편입니다. 나머지 인테리어 부분은 황토로 벽체를 했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하거나 한지를 바르는 게 전부입니다.

우리 몸에 좋다는 것과 친환경적이란 말은 어쩌면 동의어로 우리의 몸은 자연 그대로의 환경을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던 헌 집이 수명을 다해서 그것을 뜯어 자연으로 돌려보내고자 할 때 지붕을 뜯고 벽체를 허물며 골조를 해체해 자연 속에 그대로 돌려보낼 것과 건축폐기물 저장소로 실어 옮길 것을 분리해보면 폐자재의 90% 이상은 나무와 흙입니다. 흙은 그대로 대지로 보내고 나무는 땔감으로 재사용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하인방 밑에 조적용으로 쓴 시멘트와 비용절감을 위해 얹었던 지붕의 시멘트기와 그 뿐입니다. 더더욱 비용절감을 기하려 했던 건축물이라면 방수시트와 스티로폼 정도가 집의 폐기물 전부일 것입니다.

2] 실내의 대류현상

▲ 한옥의 천정구조
3] 숨 쉬는 한옥

▲ 한옥의 황토벽 처리
황토 흙을 한 줌 떠서 현미경으로 보면 아주 수많은 기공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이 미세한 많은 기공들은 고온다습한 우리나라의 여름철 습기를 빨아들여 외부에 비해 낮은 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어떤 첨단의 건축자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비결입니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기온이 높은 중동에 가면 보통 4~50도를 오르내리는데 햇볕에서는 못 견디게 덥다가도 태양이 차단되는 그늘에 가면 금방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렇듯 습도란 놈도 기온 못지않게 더위를 느끼게 하는 주된 원인이지요.

이렇듯 여름철엔 다습한 공기를 황토벽에 가두어 쾌적한 실내를 만들며 반대로 겨울에는 머금고 있던 습기를 방안으로 방출함으로써 건조한 실내를 적당하게 조절하는 기막힌 '천연습도조절기'역할을 하는 것이 황토벽인 것입니다. 집의 골조를 이루고 있는 나무 또한 흙과 마찬가지로 많은 기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즘 잘 지어졌다고 하는 목조주택에 가보면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는 걸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특히 겨울철에 하룻밤만 그 집에서 지내보면, 일반적인 주택에서와는 달리 무척 갑갑한 느낌을 쉽게 받는데 이는 외부의 온도를 차단하기 위해 보온공법을 사용했기 때문으로 보여 지는데 목 골조를 설치한 다음, 맨 외부의 사이딩에서 부터 타이벡(tyvek), OSB합판, 인슐레이션, 합판, 내부마감재 등 많은 종류의 가공된 자재를 시공하게 되어 단순히 흙으로만 차단된 한옥과는 많은 차이가 있어 외기와 내기가 소통할 수 있는 여건이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 한옥은 절대 비싸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한옥이 비싸다고들 합니다. 어떤 부분은 맞는 말이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잘 못 인식되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목조주택도 다양한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한옥은 이보다 훨씬 더 합니다. 그것은 한옥이 타 건축물과 달리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예를 들어 기둥과 도리와 보로 대표되는 기본적인 구조재 외에 수많은 치장재로 화려하게 꾸밀 수 있고 또한 나무의 크기와 굵기를 마음대로 키울 수가 있는 것이며, 원목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고가에서 저가에 이르기까지 자유자재로 골라 쓸 수가 있어서 획일적으로 "평당 얼마에 짓는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옛날 양반집과 요즘 많이 짓는 한옥들과 비교해 본다면 가로, 세로가 5치[1치:약3cm]에 길이가 9자[1자: 30.303cm] 짜리 각재라면(제재목) 기둥 하나가 18.75才[1才:1치*1치*12자]가 되는데 요즘 한옥은 주로 7치를 많이 씁니다(약36.75才) 6~70년대 까지만 해도 서민들 집의 기둥은 보통 4치를 썼습니다.
옛날에 비해 거의 두 배 정도가 비싸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나머지 도리와 보, 서까래를 합치면 2.5배 이상 차이가 나고 또 치장재를 많이 쓸수록 격차는 더욱 커지니 3배 이상 나무 양이 소요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25평[1평:3.305m2]을 기준으로 해서 7~8000才가 넘지 않는 것이 옛날 우리 조상들의 집이었다면 지금은 20,000~25,000才 이상 소요되어 나무 값보다 더 비싼 인건비를 감안하면 ‘한옥이 비싸다’ 라는 얘기가 당연한 것입니다.
한옥이 사장위기에 접어들던 국가적으로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70년대로 추정하는데, 통상 인건비를 책정할 때 나무 양과 비교해서 계산하는 버릇이 남아 있어 지금도 즐겨 쓰고 있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며 건축주와 도목수가 나무 소요량을 상의할 때 이 방법을 쓰게 되면 목수는 나무의 양을 당연히 늘리려 합니다.
그래서 한옥건축을 하고자 하는 건축주는 보다 실용적이고 좀 더 치밀한 계산으로 나무 양을 정하는 일이야말로 한옥을 값싸게 짓는 절대적인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목조 부분을 경제적으로 정하고 난 다음에는 시멘트를 쓴다, 스티로폼이나 합판을 쓴다는 생각은 버리고 그야말로 친환경적이고 우리 몸에 좋은 황토로 벽체를 구성한다거나 구들을 깐다면 우선은 건축비가 증가할 수 있지만 멀리 내다보면 여름철과 겨울철에 냉난방비의 절감에 큰 도움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 한옥의 실용성
사람들은 전래의 한옥이 불편하고 비실용적이라고 합니다. 멀리 떨어진 화장실, 재래식 좌식 부엌, 좁은 방.. 느끼기에 따라선 불편한 구석은 많지요. 그러나 현대의 한옥은 어느 구석에서 불편하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실내에 수세식 좌변기를 놓을 수도 있으며 ,싱크대를 놓아 입식형식으로 생활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콘크리트로 타설된 현대주택보다 오히려 더 편리하게 실용적 구조로 꾸밀 수 있는 것이 현대 한옥의 매력입니다. 초기 시행착오로 설계가 잘못 되어졌다고 해도 훗날, 콘크리트 주택보다 훨씬 쉽게 구조변경을 하기가 용이한 장점도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매일 계속되는 "전력 사용량, 사상 최고치 운운"하는 소리를 우리나라 국민이면 다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또 많은 수의 사람들은 전기가 끊겨 밤새 에어콘은 고사하고 선풍기 없이 비지땀 속에서 곤혹을 치르거나 냉장고 속의 음식물이 다 부패해 식상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이나 미국, 캐나다에서 종종 일어나는 대형 정전사태를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인구밀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자주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편으로 또다른 장점은 세계의 건축가 및 과학자,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난방법이라는 우리 고유의 ‘온돌구들방’을 놓는다면 겨울철에도 국가적 차원이나 환경적 차원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4계절이 뚜렷하던 우리나라가 지구의 온난화와 함께 봄과 가을이 퇴색되어 긴 여름과 긴 겨울, 두 철만 있다고 할 정도로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습니다. 매년 그 기록을 갈아치우는 강우량과 적설량의 증가와 함께 무더운 더위와 맹추위가 한반도를 휩쓰는 것이 요즘의 기후이며 여름철 냉방기의 사용량 증가와 함께 추위를 이기기 위한 난방시설비 또한 만만치가 않습니다.

이처럼 한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는 과학적인 구조로 되어있는 한옥의 실내, 하절기의 다 습도와 동절기의 저 습도를 알아서 조절 해주는 황토벽은 고비용의 에너지 사용은 물론, 여기 저기 거미줄같이 얽혀 무질서한 전선하며 각종의 가전제품들을 갖추어야만 살아 갈 수 있는 타 건축물에 비해 우리의 한옥은 간결하고 깔끔함을 유지시켜 주는 참으로 실용적인 건축물이라 할 것입니다.
한옥의 과학적 우수성과 특징



앞장에 이어 한옥을 짓는 과정은 일반 독자층으로선 신비롭게만 비쳐질 것이며 모름지기 알듯말듯한 한옥용어부터 우리 것 이지만 생소하기가 그지없다. 실제로 우리 한옥은 시공시에도 현대건축기법과는 다르게 못을 거의 쓰지 않고 짜 맞추는 형식으로 구성한다. 못을 사용하게 되면 녹이 슬 경우 재목이 치명적 손상을 입기 때문이며 재목을 치밀하게 다듬어 요철을 빈틈없이 짜 맞추는 대목의 기술에 이르러서는 감탄할 따름이다.
그리고, 우리 건축의 미학과 과학적 우수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예는, 앞장에서도 잠시 설명했듯이 기둥의 가운데를 위?아래쪽보다 불룩하게(배흘림) 깎는다든지, 건물의 양 끝에 세운 기둥의 위쪽 끝 부분을 안으로 쏠리게(안쏠림) 하거나, 창방의 양 귀쪽을 솟도록(귀솟음) 살짝 들어 올린다든지 하는 건축 기법등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배려는 건축을 마주하고 선 사람의 위치에서 볼 때 반듯하게 보이도록하는 착시의 과학을 활용한 것으로, 단순한 손 기술을 넘어 예술과 과학의 조화로 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전통마을 등 우리나라 곳곳에는 이 같은 섬세한 과학이 스며든 한옥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들 한옥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첨단 건축물이기도 하다. 목공이 흙과 나무와 기와만으로 수백 년을 견디는 건물을 지은 땀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기와 한옥을 마주하면 더 진한 감동으로 느껴오듯 앞으로 이러한 한옥의 잔잔한 감동을 느껴보실 수 있도록 써 나가겠으며 이번 장에선 기단과 초석,지붕으로 우리의 한옥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을 정리하겠다.
9].기단
▲ 기단
기단이란 전통 가옥에서 우천시에 빗물이 튀는것과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고 동시에 건물의 군위를 높히기 위하여 건물 밑부분에 돌을 쌓거나 다른 자재를 써서 쌓아 올린 단인데, 돌로만 쌓기도 하며 기와와 벽돌을 또는 돌과 벽돌을 섞어 쌓기도 한다.

가.쌓는 재료에 따른 분류
토 단 : 조선시대 서민주택의 기단, 흥륜사지
토축기단 : 토축 기단은 일반 살림집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진흙을 다져 쌓아 올려 만드는 기단인데 견고성을 위하여 작은 돌을 섞어 쌓거나 목심을 박아 쌓기도 하고 때로는 기와 편을 섞어 쌓기도 한다. 토축기단을 죽담이라고도 한다.
판전으로 백제시대 건축, 익산 왕궁탑
전축기단 : 벽돌이나 기와를 세우거나 눕혀 마무리하는 형식, 부여 군수리 사지, 화성성곽 포루

석축기단 : 자연석(막돌)이나 다듬은돌로 마무리한 형식으로 한국 기단의 주류를 이룬다.

- 자연석 기단(막돌 기단)
자연석 기단은 크고 작은 자연석을 서로 맞춰가면서 쌓은 기단으로 매우 폭넓게 사용되었다. 안동 양진당, 의성 김씨종택 등의 살림집과 봉정사 대웅전, 쌍계사 대웅전, 전등사 대웅전, 금산사 미륵전, 화암사 극락전 등의 사활건축에서 볼 수 있다.

- 장대석 기단
장대석 기단은 도로 경계석과 같이 생긴 일정한 길이로 가공된 장대석을 층층이 쌓아 만든 기단을 말한다. 조선시대 가장 널리 사용되던 기단으로 지금도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다.장대석기단의 맨 위층 모서리에서는 두 장대석을 'ㄱ'자 모양으로 붙여 놓았을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귀가 벌어지는 결정을 보완하기 위해 큰돌을 'ㄱ'자 형태의 통돌로 만들어 놓는데 이를 귀틀석이라고 한다.

- 가구식 기단
가구식 기단은 매우 고급스런 기단으로 주로 고려 이전의 중요 건물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화강석을 가공하여 만들었는데 장대석 기단과 다른 점은 목조 가구를 짜듯이 구성한다는 것이다.

나.단형식의 수에 따른 분류
단층기단 : 높이에 관계없이 하나의 층
다층묘단 : 층수가 2이상이 되는 것

다.마감석재의 형태와 층에 따른 분류
막돌 허튼층 쌓기 : 봉정사 대웅전, 부석사 석축, 해인사 대장경 판고
막돌 바른층 쌓기 : 금산사 미륵전 측면기단
다듬돌 허튼층 쌓기 : 도동서원 강당.
다듬돌 바른층 쌓기 : 도산서원 전교당

라.돌쌓기 종류
막돌막쌓기 납작돌수평줄눈쌓기 개울돌막쌓기 사고석쌓기
이고석쌓기 상하장대식막돌면석 견치돌빗쌓기 빗쌓기


10].초석

▲ 초석

초석은 주초라고도 하며 기둥 밑에 놓여 기둥에 전달되는 지면의 습기를 차단해주고, 기둥의 하중을 받아 기단을 통해 지반에 효율적으로 전달시키는 역할을 한다. 삼국 시대의 초석이 고려 시대나 조선시대의 것보다 더욱 정교하게 가공되었다.
목조탑에서는 종교적 숭앙물인 사리봉안을 위해 건물 내부에 특수 초석(일명 심초석)을 지하에 매설하는 경우도 있다. 초석의 크기는 판석으로 부터 기둥으로 간주되는 대형초석까지 있으며 영조법석의 기록을 보면 초석의 크기를 임의로 결정지을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초석은 지상에 노출되기 때문에 민족적 정서에 따라 많은 조각과 장식이 들어가기도 한다.
초석에는 자연석을 돌생김새의 굴곡면에 기둥을 깎아 맞춰 얹어 놓음으로서 초석과 기둥의 일치감을 주어 견고한 안정감과 자연스런 조화를 주는 막돌 초석과, 막돌을 가공하여 만든 다듬돌 초석이 있다.
막돌초석(덤벙柱礎) :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된 것으로 자연에서 채취한 적당한 크기의 돌을 그대로 사용 된 것이다.
-건축물 : 내소사 대웅전, 하동 쌍계사 후문
다듬돌초석(加工柱礎)
원형초석 : 막돌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원형기둥이 서는 부분을 볼록하게 만든 초석.
방형초석 : 사각기둥을 받도록 만든 초석.
8각형초석 : 8각형 기둥을 받도록 8각형으로 된 초석.
-건축물 : 고구려의 쌍영총, 석굴암 8각석축, 나주향교 대성전
원주형초석: 조선시대의 루건축(樓建築)에 많이 사용되었던 초석으로
초석자체를 민흘림 기둥으로 하고 밑등을 넓적 하게 처리하여 안전하게 한 것이다.
-건축물 : 범어사 일주문, 정읍 피향정
방주형초석: 단주형(短柱形)과 장주형(長柱形)이 있다.
-건축물 :단주형- 궁궐, 일반상류주택, 경복궁 자경전 , 장주형- 루(樓), 정자의 초석, 경복궁 경희루

11].지붕
가. 기와집
기원전 후로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우리의 전통한옥의 백미인 기와는 예전에 기와를 기와장이가 얹기까지, 기와를 만들 때, 큰 틀 안에 모래와 흙 그리고 물을 붓고 나서 소로 하여금 이리저리 밟고 다니도록 해서 잘 이긴 뒤에, 이 흙을 기틀에 넣어 꼴을 잡아 말리고 잿물을 발라 가마에 넣어 구웠으며 따라서 큰집을 지을 때에는 돈을 미리 주고 필요한 수량의 기와를 맞추어 두어야 했습니다.

서민 가옥의 기와 일은 먼저 암기와를 나란히 깔고 사이사이에 숫기와를 덮고 나서, 숫기와 앞에 흙과 백토로 빚은 아귀토로 막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러나 잘 짓는 집에서는 암막새를 먼저 놓고, 암키와를 서너 겹으로 겹쳐 깔아서 한두 장이 깨져도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수키와도 역시 숫막새를 먼저 놓고 홍두깨흙을 얹은 뒤에 덮어 나가며 지붕마루에는 적새라 하여 암기와를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리고 맨 위에 숫기와를 덮었다. 따라서 암기와를 많이 덮을수록 지붕마루가 높아져서 집 자체가 커 보인다.
어떤 기와집에서는 복문이라고 하여 적새 위에 숫기와를 얹을 때, 한가운데의 두 장을 서로 어스러지게 팔자(八字) 모양으로 마주 세워 두는 일이 있으며 이를 세울 때 주인은 기와장이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므로 상량을 올리는 날이 목수의 생일이라고 하듯, 이날을 기와장이의 생일이라고 한다. 민간에서는 이 문으로 복이 들어온다며, 까치구멍처럼 원래는 채광이나 배연을 위해 마련해 두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또 팔작지붕의 경우에는 지붕마루마다 망와라 하여 도깨비 모양의 암막새를 얹습니다. 망와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귀면에 가까우나 뒤에 점차 약화되어 왔고, 곳에 따라서는 태극이나 주역무늬가 새겨진 것을 쓰기도 한다. 근래에는 사람 얼굴모양의 것을 많이 얹으며 단지 꽃잎을 양각한 것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망와는 잡귀를 물리쳐 준다는 속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 초가집
▲ 초가집
볏짚을 언제부터 지붕에 덮기 시작하였는지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벼농사가 시작된 삼국 시대에 이미 이것을 사용했으리라고 추측된다.

볏짚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그 안의 공기가 여름철에는 내리 쬐는 햇볕을 감소시키고, 겨울철에는 집안의 온기가 밖으로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리고 겉이 비교적 매끄러워서 빗물이 잘 흘러내리므로 두껍게 덮지 않아도 스미지 않으며 누구든지 이를 쉽게 덮을 수 있어 편리하며 또 초가지붕은 짚 자체가 지닌 성질 때문에 따뜻하고 부드럽고 푸근한 느낌을 주며, 한 해에 한 번씩 덧덮어 주므로 집에 각별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거의 언제나 밝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준다.
지붕의 물매는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농가의 마당이 좁을 때에는 고추 따위의 농작물을 널어 말리며, 천둥 호박이나 바가지의 덩굴을 올려서 지붕을 밭의 일부로 사용하기도 한다. 짚으로 지붕을 잇는 방법에는, 비늘 이엉법과 사슬 이엉법의 두 가지가 있다.

앞의 이름은 그 모양이 물고기의 비늘을 닮은 데에서 온 것으로 짚의 수냉이를 한 뼘 정도 밖으로 내어서 엮는 방법이며 길게 엮은 날개 두 장을 이엉꼬챙이로 꿰어 올린 다음, 지붕의 앞뒤를 덮고 남은 부분으로 좌우 양쪽의 벽을 가릴 수 있다. 수명은 사슬 이엉보다 오래 간다.
사슬 이엉은 수냉이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일정한 크기로 엮은 날개 수십 장을 둥글게 말아서 지붕 위로 올린 뒤에, 멍석을 펴듯이 펴 나가면서 지붕을 덮는 방법이다. 처음에는 수냉이가 처마 밑으로 오도록 깔고, 다음에는 이와 반대로 하여 덮어 나가며 사슬 이엉으로 이으면 지붕의 표면이 매끈하며,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두고 새끼를 늘여 서까래 끝에 잡아맨다.

우리나라의 서북지방에서는 주로 비늘 이엉으로 그리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사슬 이엉으로 덮으며 이렇게 이엉으로 지붕을 덮은 뒤에는 용마루에 용구새를 얹어서 마무리 짓는데 이것은 빗물이 잘 흘러내리게 좌우양쪽으로 비탈이 지도록 솜씨 있게 엮어야 하며 또 바람이 심한 데에서는 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기 위 해 새끼를 그물처럼 엮어서 덮는다.
충청도에서는 가로로 길게 매는 것을 '장매', 세로로 짧게 매는 것을 '가르매' 라고 하며 서까래 끝이 썩지 않도록 이엉을 길게 늘어뜨리는 것을 '지스레미'라고 한다. 초가지붕은 대체로 모임지붕의 형태를 이루나 겹집인 경우 이른바 까치구멍이라고 하여 용마루를 짧게 하고 좌우 양끝의 짚을 안으로 욱여넣어서 까치가 드나들 만한 구멍을 내어 두는 일이 있다. 이 구멍으로 집안에 햇볕이 들어오고 연기가 빠져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멍은 초가집뿐만 아니라 너와집이나 굴피집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지붕위에는 취두, 용두, 잡상 등을 두었으며 귀면 등을 장식’ 하여 큰 건물의 지붕을 이루었으며 형태에 따라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다.모양에 따른 분류
1.맛배지붕:
▲ 맛배지붕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주심포 양식에 많이 쓰이며 처마 양끝이 조금씩 올라가고 측면은 대부분 노출되는 구조미를 이루어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개심사 대웅전, 선운사 대웅전등이 있다.
2.우진각지붕:

▲ 우진각지붕
지붕면이 전후좌후로 물매를 갖게된 지붕양식으로 지붕면의 높이가 팔작지붕보다 높게 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고등이 있다.
3.팔작지붕:

▲ 팔작지붕
가장 아름다운 구성미를 지닌 지붕으로 곡면이 특이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통도사 불이전등이 있다.
4.사모지붕: 현존하는 사찰 건축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조로 불국사, 관음전, 창덕궁 연경당의 농수전 등이 있다.

5.육모지붕: 평면이 육각으로 된 지붕으로 경복궁 향원정이 있다.
6.팔모지붕: 평면이 팔각으로 된 지붕

7.J자형 지붕: 통도사 대웅전

8.십자형 지붕: 전주 송광사범종루,비원부응정

[김왕직,그림으로 보는 한국건축용어 참고]
라.지역에 따른 분류
1. 함경도 지방형
구조 :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분포된 이 형은 부엌-정주간과 방들의 일부가 "田"자형으로 구성된다. 이를 일명 "田자형 주택"이라고도 한다. 이형의 특징은 부엌과 정주간 사이에 벽체가 없이 하나의 커다란 공간을 형성하고 그 옆으로 방들이 "田자형"을 이루면서 서로 붙어 있고, 또 부엌의 부뚜막과 아궁이는 부엌과 정주간 사이에 자리하게 되어 자연히 부엌바닥과 정주간 바닥 간에는 상당한 높이차가 형성된다. 이 형은 부엌 한쪽에 외양간과 디딜방앗간 등이 놓이고 방들이 서로 벽을 공유하면서 서로 맞붙어 있는 것은 추운 지방의 기후적인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함이다. 또 같은 원인으로 "대청"이 설치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타지방과 비교 : 한편 강원도의 고성에는 함경도지방형과 흡사하면서도 정주간이 없는 대신 "田"자형 방 앞에 긴 툇마루가 옥내에 설치되는 특수한 평면유형이 분포되어 있다.

2. 평안도 지방형
구조: 평안도와 황해도 북부의 일부지방에 분포된 형으로 부엌과 방들이 [一]자형으로 구성되어 "一자형"이라고도 합니다. 또 부엌과 방 두개가 연속으로 구성되어"삼간형(三間形)"이라고도 하며, 남부지방의 가난한 서민주택들이 이 형을 많이 채택하기 때문에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므로 "일반형"으로 분류한 학자들도 있다. 평안도나 황해도의 서민주택들은 일반적으로 몸채를 "一자형"으로 하고 여기에 따로 광, 오양간, 측간 등이 하나의 채로 구성하여 부속채를 이루게 된다.
타지방과 비교: 남부지방의 "一자형"은 더운 지방이니만큼 대부분 대청마루가 1간 더 있게 되어 북쪽의 일자형과는 엄연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

3. 중부 지방형
구조: 황해도 남부와 경기도, 충청도 일대의 중부지방에는 "ㄱ자형"이 분포되는데, 평면이 "ㄱ자"모양을 이루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지방형"과 같은 "ㄱ자형"이나 부엌과 안방의 방향이 중부 형에서는 남향이고, 서울지방형에서는 동서향이 되는 것이 다르다.

4. 남부 지방형
구조: 부엌, 방, 대청마루, 방이 일렬로 구성되기 때문에 "一자형"이라고도 한다. 서민주택 중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에서는 일자형 몸체 이외에 광, 헛관, 오양간, 측간 등으로 구성된 부속채가 별도로 세워진다.
타지방과 비교: 평안도지방의 一자형과 다른 것은 여름철에 대비하여 대청마루가 방과 방 사이에 있다.
5. 제주지방형

제주도라는 특정지역인 섬에 분포된 형으로 그중앙에 대청마루인 상방을 두고 이의 서측으로 부엌과 작은구들, 동측으로 큰구들과 고팡을 배치하였으며 큰구들은 부모들이, 작은구들은 자녀들의 공간이고, 부엌의 부뚜막은 작은구들 쪽과 반대되는 위치에 두어 취사시의 열이 방에 들지 않도록 했다. 또 큰구들과 작은구들의 구들고래들은 방 전체의 3분의 2 정도만 깔리는 것이 특징이며 고팡은 물건을 보관하는 수장고인 것이다//[전원생활길잡이:양평여행
출처 : 양평여행
글쓴이 : 후에미소(권대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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