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二 爲學 57 글을 짓는 것은 해로운 것이다.
問:作文害道否?(문,작문해도부)
묻기를, 글을 짓는 것은 도를 딲는 데 해가 되는 것입니까? 하니
曰:害也。(왈해야)
말하기를 해가 되는 것이다.
凡爲文(범위문)
무릇 글을 짓는 데는,
不專意則不工(부전의칙불공)
마음을 집중하지 않으면 훌륭하게 지을 수 없다.
若專意則(약전의즉)
만약 자기의 뜻을 글을 짓는데 기울이게 되면
志局於此(지국어차)
그 마음은 여기에 집중되고 말 거이다.
又安能與天地同其大也?(우안능여천지동기대야)
어찌 천지와 함께 마음을 크게 넓게 할 수 있겠는가?
《書》曰(서왈)
서경에 말하기를,
"玩物喪志。(완물상지)
물을 희롱하면 중요한 뜻을 잃는다고 하였다.
爲文亦玩物也(위문역완물야)
글을 짓는 것 또한 물을 희롱하는 것이 된다.
呂與叔有詩云(여여숙유시운)
여여숙(呂與叔)의 시(詩)에 이르기를
學如元凱方成癖(학여원개방성벽)
학문은 두원개(杜元凱)와 같이 벽(癖)을 이루었고
文似相如台類俳(문사상여태류배)
문장은 사마상여(司馬相如)를 닮아 배우와 같다.
獨立孔門無一事(독립공문무일사)
홀로 공자의 문하에 서서 한 일은 하나도 없으나,
只輸顔氏得心齋(지수안씨득심재)
다만 안씨(顔氏)의 심재(心齋)에 졌다.‘고 하였으니,
此詩甚好(차시심호)
이 시는 매우 좋은 내용이다.
古之學者(고지학자) 惟務養情性(유무양정성)
옛날의 학자들은, 오직 마음을 수양하는 데 힘썼고,
其他則不學(기타즉불학)
그 밖의 학문은 배우지 않았다.
今爲文者(금위문자) 專務章句(전무장구)
오늘 날 문장을 짖는 자들은, 오로지 문장 구절에만 힘을 써서,
悅人耳目(열인이목) 旣務悅人(기무열인)
남의 귀와 눈만을, 즐겁게 하려고 할 따름이다.
非俳優而何(비배우이하)
남을 즐겁게 하려고 하니 배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였다.
曰 古者學爲文否(왈고자학위문부)
또 묻기를, “옛날에도 작문을 배웠습니까?”하였다.
曰人見六經(왈인견육경)
말하기를, “사람들은 6경을 보면서,
便以謂聖人亦作文(변이위성인역작문)
성인(聖人) 역시 작문을 한 것이라고 하는 데,
不知聖人亦攄發腦中所蘊(불지성인역터발뇌중소온)
이는 성인이 가슴속에 쌓아둔 것을 발표하자,
自成文耳(자성문이)
저절로 문장이 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所謂有德者必有言也(소위유덕자필유언야)
이른바 덕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이 있다는 것이다.”고 하였다.
曰(왈)
또 묻기를,
游夏稱文學何也(유하칭문학하야)
“자유와 자하가 문학에 뛰어나다고 일컫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하니,
曰(왈)
말하기를,
游夏亦何嘗秉筆學爲詞章也(유하역하상병필학위사장야)
“자유와 자하가 또한 일찍이 붓을 잡고 사장(詞章)을 짓는 것을 배웠겠습니까?”
且如觀乎天文以察時變(차여관호천문이찰시변)
또한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고,
觀乎人文以化成天下(관호인문이화성천하)
인문(人文)을 관찰하여 천하를 변화시키는 것이,
此豈詞章之文也?(차기사장지문야)
어찌 사장(사장)의 글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정씨유서(程氏遺書)> 제18(第十八)
이 대목은 이천 선생과 그의 제자인 유안절(劉安絶) 과의 문답으로, 학문과 작문의 관계를 말한 것이다. 아름다운 문장에만 힘을 기울인 작문은 사람의 이목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오직 수양과 덕을 쌓은 사람은 작문을 따로 배우는 것이 아니고, 도를 터득한 그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곧 작문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글을 짓는 것은 성인의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는 장애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近思錄' 카테고리의 다른 글
卷二 爲學 59、학문의 목적은 도(道)에 두어야 한다. (0) | 2016.03.25 |
---|---|
卷二 爲學 58、학문은 치지(致知)가 필요하다. (0) | 2016.03.25 |
卷二 爲學 56 도(道)를 얻으려면 유학(儒學)을 익혀야 한다. (0) | 2016.03.25 |
卷二 爲學 55、학문이란 죽은 뒤에 끝나는 것이다. (0) | 2016.03.25 |
卷二 爲學 54 이미 사물에 통달했다면 뜻을 둘 필요가 없다. (0) | 2016.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