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

한비자韓非子 제20편第20篇 해노解老 : 시각과 청각과 지력을 혹사시키지 마라.

강병현 2014. 8. 30. 13:39

한비자韓非子 제20편第20篇 해노解老 : 시각과 청각과 지력을 혹사시키지 마라.

 

- 한비자 제20편 解老[6]-

 

聰明睿智(총명예지) 天也(천야) 動靜思慮(동정사려) 人也(인야)

청각과 시각과 지력(知力)은 천성이지만 행위와 생각은 인위적이다.

人也者(인야자) 乘於天明以視(승어천명이시)

그래서 인간은 하늘에서 주어진 시력에 의해서 보아야 되고,

寄於天聰以聽(기어천총이청) 託於天智以思慮(탁어천지이사려)

하늘에서 주어진 지력(知力)으로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故視强(고시강) 則目不明(즉목부명)

그러므로 인간이 눈을 함부로 쓰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며,

聽甚(청심) 則耳不聰(즉이부총)

청각을 혹사하면 귀가 들리지 않게 되며,

思慮過度(사려과도) 則智識亂(즉지식난)

생각이 지나치면 지력이 혼미하게 되는 것이다.

目不明(목부명) 則不能決黑白之分(칙부능결흑백지분)

눈이 안보이게 되면 흑백을 가리지 못할 것이며,

耳不聰(이부총) 則不能別淸濁之聲(즉부능별청탁지성)

귀가 들리지 않으면 소리의 맑고 흐림을 식별하지 못할 것이고,

智識亂(지식난) 則不能審得失之地(즉부능심득실지지)

지력이 혼미하게 되면 이해득실의 한계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目不能決黑白之色則謂之盲(목부능결흑백지색칙위지맹)

눈이 흑백을 가리지 못하는 상태를 맹(盲)이라 하며,

耳不能別淸濁之聲則謂之聾(이부능별청탁지성칙위지농)

귀가 소리의 청탁을 식별하지 못하는 것을 농(聾)이라 하고,

心不能審得失之地則謂之狂(심부능심득실지지칙위지광)

마음이 이해득실의 한계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을 광(狂)이라 한다.

盲則不能避晝日之險(맹칙부능피주일지험)

맹이 되면 백주에도 위험을 피할 수 없을 것이며,

聾則不能知雷霆之害(농칙부능지뇌정지해)

농이 되면 벼락이 떨어져도 알지 못하며,

狂則不能免人間法令之禍(광칙부능면인간법령지화)

광이 되면 인간 사회의 법령위반부터 일어난다. 화도 모면할 수 없다.

書之所謂 治人 者(서지소위 치인 자)

노자가「사람을 다스린다」고 한 것은,

適動靜之節(적동정지절) 省思慮之費也(생사려지비야)

행위의 절도를 적당히 하고 생각하는 노력을 절약하는 일이며,

所謂事天者(소위사천자)

이어서「하늘을 섬긴다」고 한 것은,

不極聰明之力(부극총명지력)

시력과 청각을 극도로 사용하지 않으며,

不盡智識之任(부진지식지임)

지력을 극도로 작용시키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苟極盡(구극진)

만일 시력과 청각과 지력을 극도로 사용하거나

則費神多(칙비신다)

작용시키게 되면 정신을 소모하게 된다.

費神多(비신다) 則盲聾悖狂之禍至(칙맹농패광지화지)

정신을 소모하는 일이 많으면 맹, 농, 광 등의 화를 입게 된다.

是以嗇之(시이색지)

그래서 인색한 것이다.

嗇之者(색지자)

인색하다는 것은

愛其精神(애기정신) 嗇其智識也(색기지식야)

정신을 소중히 사용하고 시력을 아끼고 아껴 사용한다는 뜻이다.

故曰(고왈)

그래서 노자는

治人事天莫如嗇(치인사천막여색)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인색함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고 한 것이다.

衆人之用神也躁(중인지용신야조)

세상 많은 사람들이 정신을 사용하는 방법은 부산하다.

躁則多費(조칙다비) 多費之謂侈(다비지위치)

부산하면 낭비가 많다. 낭비가 많음을 치(侈)라 한다.

聖人之用神也靜(성인지용신야정)

그와는 반대로 성인의 정신 사용법은 조용하며 침착하다.

靜則少費(정칙소비) 少費之謂嗇(소비지위색)

조용하면 낭비가 적다. 낭비가 적은 것을 색(嗇)이라 한다.

嗇之謂術也(색지위술야)

색의 술(術)은 자연의 도리에서 비롯한다.

生於道理(생어도리)

그러므로 색을 실행하게 되면 그 사람은 도에 따라 이(理)에 복종하는 셈이 된다.

夫能嗇也(부능색야)

세상 사람들은 병이 들어 화를 당하여도

是從於道而服於理者也(시종어도이복어리자야)

물러설 줄을 모르고, 도리에 따르지 않고 있다.

衆人離於患(중인리어환) 陷於禍(함어화)

그러나 성인은 화가 미칠 징조를 간파하기 전에

猶未知退(유미지퇴) 而不服從道理(이부복종도리)

이미 허심탄회하여 도리에 복종한다. 이것을 조복(早服)이라 한다.

聖人雖未見禍患之形(성인수미견화환지형)

성인이 비록 화와 우환의 형체를 알지 못하더라도

虛無服從於道理(허무복종어도리) 以稱蚤服(이칭조복)

마음을 비우고 도리에 따르는 것을 조복(早服)이라 말하는 것이다.

故曰(고왈)

그래서 노자는

夫謂嗇(부위색) 是以蚤服(시이조복)

「전심전력으로 색(嗇)을 지켜야만 초복(早服)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