近思錄

卷七 出處 25. 증자가 임종 시에 자리를 바꾼 까닭

강병현 2020. 11. 2. 13:10

卷七 出處 25. 증자가 임종 시에 자리를 바꾼 까닭

 

 

人苟有朝聞道夕死可矣之志(인구유조문도석사가의지지)

사람이 진실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을 갖고 있다면,

 

則不肯一日安於所不安也(즉불긍일일안어소불안야)

불안한 곳에 하루도 편히 있지 않는다.

 

何止一日(하지일일) 須臾不能(수유불능)

어찌 하루에 그치랴. 잠시도 편안할 수가 없다.

 

如曾子易簀(여증자역책)

증자(曾子)가 임종 때 자리를 바꾼 것도,

 

須要如此乃安(수요여차내안)

이와 같이 하여야 편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人不能若此者(인불능약차자)

사람들이 이와 같이 하지 못하는 것은,

 

只爲不見實理(지위불견실리)

다만 참된 이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實理者(실리자) 實見得是(실견득시) 實見得非(실견득비)

참된 이치란, 실로 옳음을 얻고, 실로 잘못된 것을 보는 것인데,

 

凡實理得之於心自別(범실리득지어심자별)

무릇 참된 이치를 마음속에 갖고 있다면 스스로 구별할 수가 있을 것이다.

 

若耳聞口道者(약이문구도자) 心實不見(심실불견)

귀로 듣고 입으로 말을 하는 것 같은 것은, 마음의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다.

 

若見得必不肯安於所不安(약견득필불긍안어소불안)

만약 이를 보았다면 반드시 편치않는 곳에서 편히 지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人之一身(인지일신) 儘有所不肯爲(진유소불긍위)

사람의 한 몸은, 즐기지 않는 일이 있어도,

 

及至他事(급지타사) 又不然(우불연)

다른 일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도 않다.

 

若士者(약사자) 雖殺之使爲穿窬(수살지사위천유)

선비 같은 자는, 비록 죽인다고 해도 도둑질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必不爲其他事未必然(필불위기타사미필연)

그러나 그밖의 일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至如執卷者(지여집권자) 莫不知說禮義(막불지설례의)

글을 읽는 자에 이르러서는, 누구든지 예의를 말할 줄 모르는 자가 없다.

 

又如王公大人(우여왕공대인)

또한 왕후나 귀족 같은 사람들도,

 

皆能言軒冕外物(개능언헌면외물)

모두 수레나 예관(禮冠) 같은 것은 외물이라고 말은 하지만,

 

及其臨利害(급기림리해)

이해(利害) 관계에 놓일 때에는,

 

則不知就義理却就富貴(즉부지취의리각취부귀)

곧 의리를 따를 줄 모르고 부귀를 취하게 된다.

 

如此者(여차자) 只是說得(지시설득)

이와 같은 사람은, 다만 의리를 입으로만 말할 뿐,

 

不實見(불실견)

실지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及其蹈水火(급기도수화) 人能避之(인능피지)

물이나 불에 들어가게 되면, 사람은 모두 피하려 든다.

 

是實見得(시실견득)

이것은 실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須是有見不善如探湯之心(수시유견불선여탐탕지심)

선하지 못한 것을 볼 때 끓는 물에 손을 대는 듯한 마음이 있으면,

 

則自然別(즉자연별)

곧 저절로 마음가짐이 달라지게 된다.

 

昔曾經傷於虎者(석증경상어호자)

예전에 호랑이에게 물렸던 사람이 있다.

 

他人語虎(타인어호) 則雖三尺童子(즉수삼척동자)

다른 사람이 호랑이 이야기를 하면, 비록 삼척동자라고 할지라도

 

皆知虎之可畏(개지호지가외)

모두 호랑이가 두렵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終不似曾經傷者神色懾懼(종불사증경상자신색섭구)

호랑이에게 물렸던 경험이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나 얼굴빛이 질려서,

 

至誠畏之(지성외지)

진심으로 두려워 하지는 않는다.

 

是實見得也(시실견득야)

이것은 실지로 호랑이의 무서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得之於心(득지어심)

마음에 이치를 얻은 사람은,

 

是謂有德(시위유덕) 不待勉强(불대면강)

덕이 있다 하고, 힘써 노력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然學者則須勉强(연학자즉수면강)

그러나 배우는 사람은 힘써 노력해야 한다.

 

古人有損軀隕命者(고인유손구운명자)

옛 사람들은 몸을 버리고 목숨을 버리는 자도 있었다.

 

若不實見得(약부실견득)

만약 실지의 도를 얻어서 보지 못하였다면,

 

則烏能如此(즉오능여차)

어떻게 이와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須是實見得生不重於義(수시실견득생부중어의)

이것은 반드시 생명이 의(義)보다 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生不安於死也(생불안어사야)

생명은 죽음보다 편하지 않기 때문에,

 

故有殺身成仁(고유살신성인)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룬다고 하니,

 

只是成就一箇是而已(지시성취일개시이이)

다만 한 개의 옳은 도를 이루기 위한 것뿐이다.

 

<정씨외서(程氏外書)> 제15편(第十五篇)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고 한 <논어>이인편(里仁篇)에 있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증자역책(曾子易簀)이란 말은, 책을 대나무로 엮어 만든 침상을 말하는데, <예기(禮記)>단궁상편(檀弓上篇)에 나오는 고사이다. 증자가 위독하게 되었을 때 노(魯)나라의 대부인 계손(季孫)으로부터 받은 삿자리를 깔고 있었는데, 이것이 대부가 쓰는 자리라고는 말을 듣고, 자기신분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급히 바꾸도록 하였으며, 바꿔 깔자 이내 숨을 거두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견불선여탐탕(見不善如探湯)은, <논어> 계씨편(季氏篇)에 말하기를, "선한 일을 보면 미치지 못할 것같이 하고, 불선을 보면 끓는 물에 손이 닿은 것같이 하라[見善如不及(견선여불급) 見不善如探湯(견불선여탐탕)]" 이라고 하였다. 살신이성인(殺身以成仁)은 <논어> 위령공편(衛靈公篇)에 말하기를, "뜻이 있는 선비와 인자(仁者)는 삶을 구하여 인(仁)을 해치는 일은 없으나, 몸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일은 있다[志士仁人(지사인인) 無求生以害仁(무구생이해인) 有殺身以成仁(유살신이성인)]" 라고 하였다.

이 대목은 <논어>의 위령공편과 계씨편을 인용한 이천 선생의 말이다. 인덕(仁德)을 갖춘 자는 불의를 보면 정의를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는데, 이는 결코 생명을 가벼이 야기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들은 의(義)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의 도를 이루었으나, 지금의 사람들은 의를 입으로만 설명할 뿐 실행하지 못한다. 오직 뜻을 둔 선비나 어진 자만이 마음속에 항상 인(仁)을 위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